[단상] 재즈, 인스타 그리고 무목적이라는 축복에 대해

민음사 감사합니다.

by KOSAKA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낮게 깔리는 재즈 선율을 배경 삼아 인스타그램 피드를 무심히 넘기다 보면, 가끔은 광고조차도 운명적인 이정표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홍보물이 그랬다.


내 삶에 의미 있게 남은 세계문학의 한 조각을 간직한 독자들을 찾는다는 그 짧은 문구는, 마치 타임머신의 스위치처럼 나를 대학 시절의 어느 뜨거웠던 오후로 데려다 놓았다. 당시의 나는 실존주의라는 거대한 열병에 빠져 있었다. 까뮈의 이방인을 머리맡에 두고,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며 구토를 느끼던 사르트르의 문장들 사이를 헤엄치던 시간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때의 내게는 실존주의의 계보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나 장정일의 파격적인 문장들조차도 실존주의의 연장선으로 느껴졌다. 세상과 불화하며 스스로를 소외시킨 인물들이 던지는 그 서늘한 허무의 냄새가 실존주의라는 틀 안에서 완벽하게 설명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추억의 갈피를 넘기다 문득 깨달음의 파편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오랜 시간 내가 오해해왔던, 혹은 시간이 흐르며 비로소 정제된 실존주의의 진짜 얼굴에 대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실존주의를 어둡고 축축한 허무주의의 전유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 핵심은 눈이 시릴 정도의 강력한 낙관주의에 있다.


우리는 세상에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보내진' 존재가 아니라,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던져진' 존재라는 것. 이 '기투(企投)'라는 막막한 개념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의 백지를 선사한다. 우주가 나에게 부여한 숙제가 없기에, 나는 비로소 내가 되고 싶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그 압도적인 해방감 말이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철학의 영역에서 시작된 이 사유의 흐름은 엉뚱하게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과학과 맞닿았다. 인문학적 감수성의 극단에 서 있는 실존주의와, 생명을 유전자의 운반체로 정의하는 차가운 생물학이 어떻게 한 점에서 만날 수 있을까 싶지만, 그 지점은 의외로 명쾌했다.


도킨스가 주장하듯 우리 생의 생물학적 목적이 오직 유전자의 계승에 불과하다면, 인간이라는 개별적인 자아에게 '주어진' 거창한 삶의 목적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우리는 그저 유전자의 생존을 돕는 정교한 기계일 뿐이라는 그 서늘한 과학적 사실이, 오히려 인간 정신을 우주적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의 것일 뿐, 나의 자아와 의식은 그 생물학적 굴레 위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다. 목적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목적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실존주의의 제1원칙은, 유전자의 지배를 인정하는 과학 철학 안에서 가장 강력한 근거를 얻는다.


실존주의와 이기적 유전자가 상통한다는 이 통찰은 마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 불교의 공(空) 사상과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전율과도 같았다. 나는 이 대단한 발견이 혹시 나만의 독창적인 통찰이거나, 적어도 국내에서는 최초로 제기된 담론이 아닐까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제미나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의외로 담담했다. 내가 발견했다고 믿었던 그 세계는 이미 진화론적 실존주의(Evolutionary Existentialism)라는 이름으로 현대 철학의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도, 국내 최초도 아니었지만 실망감보다는 묘한 안도감과 동질감이 먼저 찾아왔다.


내가 느꼈던 그 느낌이 나만의 망상이 아니라, 인류가 진화와 존재를 동시에 고민하며 다다른 정교한 결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결국 산다는 것은 나를 복제하려는 유전자의 집요한 본능 위에서, 나만의 의미를 덧칠해가는 숭고한 반항인 셈이다.


우리는 유전자의 계승이라는 생물학적 궤도 위에 올라타 있지만, 그 안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는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주어진 목적이 없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까뮈가 말한 시지프스의 행복은, 결코 정상에 도달하지 못할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 있었다.


우리 역시 유전자의 전달이라는 끝없는 굴레를 반복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며 철학을 논하는 '불필요한 열정'을 태운다. 그 쓸모없어 보이는 열정이야말로 우리가 단순한 유전자 운반체가 아닌, '실존하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다.


인스타그램의 짧은 광고에서 시작된 이 생각의 여정은 재즈의 마지막 음표가 사라질 즈음 비로소 갈무리되었다. 다시 책장을 열어 오래된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을 꺼내 들어야겠다. 이제는 그 속의 문장들이 예전처럼 어둡게만 읽히지 않을 것 같다.


유전자가 설계한 이 정교한 감옥 안에서, 나는 오늘 어떤 자유를 설계하고 어떤 목적을 발명할 것인가. 실존의 낙관주의를 믿는 한, 던져진 생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축적해가는 기록이며 기꺼이 누려야 할 유희가 된다. 나의 브런치에 이 '이미 발견된, 그러나 나에게는 새로운' 통찰을 기록하며, 나와 같은 해방감을 느낄 누군가와의 조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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