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생물학, 양자역학 그리고 실존주의
2026년의 봄이 머지않았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결에서 미세한 온도의 변화를 감지할 때마다, 계절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우주의 시계태엽이 또 한 번 조용히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50대라는 삶의 능선에 서서 다가오는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20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질감의 감각이다. 젊은 날의 봄이 터질 듯한 맹목적인 생명력과 막연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삶의 반환점을 돌아선 지금 맞이하는 봄은 조금 더 차분하고 서늘하며, 그렇기에 더욱 명징한 사유의 시간을 열어준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와 앞으로 남은 시간의 유한함이 교차하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삶의 근원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우주의 어떤 거대한 목적이나 낭만적인 환상들이 걷힌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 치열했던 질문의 끝에서 내가 마주한 인생의 맨얼굴은 생물학과 물리학, 그리고 철학이 직조해 낸 기묘하고도 눈부신 삼중주였다.
가장 먼저 우리를 겸허하게, 혹은 뼈아프게 만드는 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보여주는 건조한 생물학적 진실이다.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를 관통하며 우리가 그토록 치열하게 욕망하고,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며 성취를 향해 달려갔던 그 모든 뜨거운 서사들을 돌아본다.
우리는 그것이 온전히 나의 고유한 의지이자 내 영혼의 특별한 끌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의 냉정한 렌즈로 들여다보면, 그 거대한 드라마의 이면에는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명령이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단히 영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 여겼지만, 실상 인간은 수십억 년을 이어온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정교한 '생존 기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처음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것은 일종의 우주적 허무와 추락하는 듯한 상실감이다. 인생에 부여된 숭고한 의미나 낭만적 환상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50대의 시선으로 이 차가운 진실을 다시 응시하면, 그 허무의 밑바닥에서 오히려 단단한 안도감과 해방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삶에 미리 주어진 거창한 우주적 사명이나 도달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목적 따위는 없다는 사실. 우리의 고뇌와 탐욕, 심지어 이타심조차도 진화의 길고 긴 궤적 속에서 빚어진 자연스러운 산물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짓누르던 무거운 당위와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나라는 존재의 불완전함과 동물적 한계를 있는 그대로 껴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생기는 것이다. 환상이 타파된 자리에는 헛된 기대가 남기지 않는 견고한 현실의 대지가 드러난다. 우리는 비로소 땅에 발을 온전히 딛고 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유전자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닫힌 회로 속의 자동인형이 아니다. 시선을 내면의 생물학에서 외부의 우주로 확장해 보면, '양자역학'이라는 경이로운 물리학적 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전 역학의 세계에서는 과거의 모든 조건을 안다면 미래의 결과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주는 정교한 시계장치처럼 정해진 운명을 향해 째깍거린다는 결정론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우주의 가장 깊은 본질이 '확률'과 '불확정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혀냈다. 입자는 우리가 관측하기 전까지 수많은 가능성의 상태로 중첩되어 존재하며,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야 비로소 하나의 현실로 확정된다. 미래는 이미 쓰여진 대본이 아니라, 짙은 확률의 안개 속에 감싸여 있는 열린 결말이다.
50대라는 나이는 종종 '이미 많은 것이 정해져 버린 시기'로 오해받곤 한다. 수십 년간 쌓아온 직업, 인간관계, 사회적 위치, 그리고 과거의 무수한 선택들이 만들어낸 궤적이 남은 생의 방향을 옴짝달싹 못 하게 강제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은유를 삶에 빌려오자면, 우리의 삶은 결코 결정된 적이 없다.
매 순간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그 '관측'의 과정이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확정 짓는 파동 함수의 붕괴를 일으킨다. 우주 자체에 근원적인 틈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개입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물리적 공간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젊은 날 이 불확실성은 언제나 나를 흔드는 불안의 원천이었지만, 50대의 나침반으로 읽어내는 불확실성은 내일이 여전히 미지의 가능성으로 충만하다는 가장 눈부신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이기적 유전자가 우리의 맹목적인 기원을 말해주고, 양자역학이 이 세계의 끝없는 불확정성을 열어준다면, 이 무심하고도 광활한 무대 위에 던져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바로 이 질문의 끝에서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가 생명력을 얻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목적 없이 우연히 태어났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확률적 세계에 놓여 있다면, 우리 삶에 미리 새겨진 본질이나 정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며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이 깊은 허무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인 무의미성을 명쾌하게 긍정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50대의 삶은 바로 이 '주체적 창조'의 무거움과 고귀함을 온전히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시기다.
세상이나 타인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 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거두고, 텅 빈 캔버스 위에 나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겠다는 결연한 의지. 유전자의 명령이라는 생물학적 중력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으며, 불확실성이라는 우주의 파도를 기꺼이 타면서 매 순간 나의 선택과 책임으로 나라는 존재를 조각해 나가는 것. 세계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이 거대하고 무심한 우주 속에서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존엄이자 반항이다.
2026년의 봄날, 창밖의 풍경을 다시 바라본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저 어린 생명들 역시 생존과 번식이라는 이기적인 명령에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 싹들이 온전한 꽃을 피워낼지, 때늦은 봄눈에 스러질지는 양자적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맹목과 불확실성의 틈바구니에서, 기꺼이 두 눈을 뜨고 나의 봄을 긍정할 준비를 한다.
나 역시 진화의 우연한 산물이자 우주를 떠도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사실을 철저하게 인지하고, 남은 삶의 매 순간에 스스로 색채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임도 깨닫는다. 이기적 유전자의 차가운 뼈대 위에, 양자역학의 열린 가능성을 근육처럼 덧붙이고, 실존주의의 뜨거운 피를 돌게 하는 것. 이것이 젊은 날의 환상을 지나 50대의 능선에서 길어 올린 가장 단단하고 진실된 세계관이다.
과거는 이미 붕괴된 파동함수처럼 하나의 궤적으로 남아있지만, 다가올 2026년의 봄과 그 이후의 시간들은 아직 관측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으로 펄떡이고 있다. 우연히 던져진 이 세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그렇기에 끝없이 자유롭다. 그 자유의 무게를 기꺼이 나의 몫으로 짊어질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나의 것이 된다.
봄눈이 녹고 다시 한번 대지에 생동감이 번질 그날, 나는 이 막막하고도 눈부신 진실을 가슴에 품고, 조용하지만 묵직한 발걸음으로 나만이 쓸 수 있는 남은 생의 문장들을 적어 내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