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적 영웅, 사이토 도오산

나라 훔친 이야기 (国盗り物語) 1·2권

by KOSAKA


낡은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나타난, 인간이라는 괴물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하코네의 언덕(箱根の坂)』을 덮고 나면 한동안 멍해진다. 응인의 난을 거치며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무로마치 막부의 수도 교토를 배경으로, 낡은 권위가 해체되는 시대의 혼란과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을 그린 소설. 그것은 시바가 그려낸, 중세의 폐허 위에서 오직 실력만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혹독한 전국시대의 서막이었다. 일본의 중세가 이렇게 흐물거리며 썩어가고 있었구나, 하는 기이하고도 서늘한 감각을 남기고 책은 끝난다.


『国盗り物語』는 그 『요괴』의 배경인 15세기 중반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시대에서 대략 반세기가 지난 뒤의 이야기다. 응인의 난(1467~1477)이 10년 동안 교토를 초토화시켰고, 그 잿더미 위로 일본에는 전국시대(戦国時代)라는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막부의 권위는 이미 이름뿐이었고, 전국의 슈고(守護) 다이묘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영지를 확장하거나 빼앗겼다.

国盗り物語-1024x555.jpg 1966년 출간된 이 작품은 당시 인기에 힘입어 대하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명분과 혈통의 시대는 끝났다. 법과 질서가 아니라 오직 '실력'이 세계의 원리가 된 하극상(下剋上)의 시대. 『国盗り物語』는 바로 그 잔혹하고도 역동적인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천하를 훔치기 위해 다섯 번 허물을 벗은 사나이


그 인간의 이름은 — 아, 그런데 이름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사내,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너무 여러 번, 그것도 완벽하게 갈아치웠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물려받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지킬 것이 없는 자, 잃을 것이 없는 자는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는 법이다. 그는 스스로 쟁취한 지위를 증명하는 영수증처럼, 혹은 더 큰 사냥감을 삼키기 위해 허물을 벗는 뱀처럼 다음의 다섯 가지 이름을 거쳐 간다.


호렌보(法蓮房): 교토 묘가쿠지(妙覚寺)의 승려. 절 안팎에서 "지혜 제일의 법련방"이라 불릴 만큼 두뇌 회전이 비상했다. 그러나 그는 향 냄새 나는 부처의 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미노국(美濃国, 지금의 기후현 일대)이라는 펄떡이는 천하의 축소판이었다. 어느 날 그는 홀연히 가사를 벗어던지고 세속의 진흙탕으로 걸어 내려온다.


마쓰나미 쇼쿠로(松波庄九郎): 환속한 그의 첫 직업은 기름 장수였다. 그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다. 교토의 대형 기름 도매상 야마자키야(山崎屋)에 들어가 특유의 처세와 비상한 상술로 신뢰를 얻어낸 그는, 결국 그 상점과 막대한 자산을 통째로 꿀꺽해 버린다.


니시무라 간쿠로(西村勘九郎): 그러나 기름 장수의 재력만으로는 천하를 노릴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합법적으로 칼을 차고 병력을 부릴 수 있는 '사무라이'의 신분이 필요했다. 미노로 내려간 그는 치밀한 공작 끝에 니시무라 가문에 입문한다. 전처의 자식을 아내로 삼으며 씨족의 이름을 성(姓)으로 취하는 기행을 저지르지만, 전국시대의 생존 논리 앞에서는 그마저도 훌륭한 전략이었다.


나가이 신쿠로(長井新九郎): 니시무라의 이름을 얻은 간쿠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거둬준 주군, 나가이 가문의 내분을 교묘하게 조장하고 틈을 파고들어 결국 그 가문마저 장악해 버린다. 이제 그는 미노의 권력 중심부에 바짝 다가선 실력자가 되었다.


사이토 도오산(斎藤道三): 주군의 주군을 치고, 마침내 미노 국 전체를 집어삼킨 실질적 지배자. 한낱 떠돌이 파계승이 한 나라의 국주(国主)가 되며 얻어낸 그의 마지막 이름이다.

06488a23884692543ee22cb609772e7a.jpg 16세기 제작 추정 사이토 도오산 초상화. 일본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시바 료타로는 이 괴물 같은 인물을 묘사하는 데 특유의 건조한 유머와 서늘한 거리두기를 구사한다. 독자는 도오산의 패륜적인 행동에 전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완벽한 행보에 묘하게 감탄하게 된다. 그는 결코 무모하거나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배신과 야망은 바둑판의 수처럼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물이다. 속임수를 쓰되 절대 들키지 않고,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되 그것이 언젠가 거둬들일 투자임을 잊지 않으며, 반드시 피를 봐야 할 순간에는 티클만큼의 망설임 없이 냉혹하게 칼을 뽑는다.


사방의 적들과 그들과의 싸움


사이토 도산의 삶은 그 자체가 거대한 전장이었다. 일개 기름 장수에서 출발해 일국의 주인이 된 자에게 평화란 애초에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나라를 훔쳤다'는 것은 곧 사방이 적이라는 뜻이다. 도산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며 권좌에 오른 대가로, 밖으로는 호시탐탐 영지를 노리는 인접국들과 안으로는 언제 등 뒤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가신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피를 말리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의 첫 번째 치열한 전쟁은 칼과 창이 부딪히는 전장이 아닌 모략의 무대에서 치러졌다. 명목상 주군이었던 미노의 슈고 도키 요리나리를 추방하고 이나바야마 성을 완전히 장악하는 과정은 낡은 권위를 무너뜨리는 하극상의 정점이었다. 도산은 인간의 탐욕과 공포를 교묘하게 조종하며, 무력 충돌을 최소화하는 대신 냉혹한 지략으로 나라를 삼켰다. 하지만 이 찬탈극은 그를 '미노의 살무사'라는 악명과 함께 고립된 절대 권력자로 만들었고, 쉴 새 없는 외부의 도전을 불러들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가장 위협적인 적은 남쪽 오와리의 '호랑이' 오다 노부히데였다. 1547년, 노부히데가 대군을 이끌고 미노를 침공한 가노구치 전투는 도산의 전술적 천재성과 잔혹함이 빛을 발한 무대였다. 도산은 성에 틀어박혀 오다군의 파상 공세를 유도하며 적의 피로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해질녘, 방심하고 퇴각하는 적의 배후를 성문을 열고 급습하여 오와리의 대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는 단순한 방어전을 넘어 도산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훗날 적장 노부히데와 화의를 맺고 그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에게 딸 노히메를 시집보내는 역사의 거대한 변곡점이 된다.


그러나 평생 사방의 적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했던 살무사의 마지막 적은 가장 가까운 곳, 바로 자신의 핏줄에 있었다. 1556년, 장남 사이토 요시타쓰와의 권력 투쟁 끝에 벌어진 나가라가와 전투는 도산의 비극적인 종착지였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 속에서도 도산은 자신이 평생 일군 미노의 강변에서 아들의 군대와 마주한다. 죽음이 임박한 전장에서 도산은 비로소 자신이 아둔하다고 무시했던 아들 요시타쓰의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위인 노부나가에게 미노를 넘긴다는 유명한 유언장(양도장)을 남긴다.


사방의 적들과 싸우며 훔쳐낸 나라는 결국 핏줄의 배신으로 무너졌지만, 도산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피워 올린 야망의 불꽃은 고스란히 노부나가에게 이어졌다. 그가 치러낸 수많은 전투는 중세의 폐허를 정리하고, 다가올 천하포무(天下布武)의 시대를 여는 장엄한 전주곡이었다.


사자의 힘과 여우의 교활함, 그 완벽한 현현


이 인물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에 자꾸만 한 권의 책이 오버랩된다.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Il Principe)』이다.


놀랍게도 마키아벨리(1469~1527)와 사이토 도오산(1494~1556)은 지구 반대편에서 완벽하게 같은 시대를 공유한 인물들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사상가가 1513년 메디치 가문에게 헌정할 이 얇고 위험한 책을 집필하며 "군주는 운(fortuna)이 아니라 스스로의 역량(virtù)으로 정상에 올라야 한다"고 단언하던 바로 그 무렵, 일본 교토의 뒷골목에서는 스무 살 남짓의 도오산이 그 이론을 온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야망의 발톱을 벼르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 메디치 가문에게 헌정한 그 얇고 위험한 책에서 단언한다. 운(fortuna)에 의해 군주가 된 자와, 자신의 역량(virtù)에 의해 군주가 된 자가 있다면 진정한 군주는 오직 후자뿐이라고. 남의 힘에 기댄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나 다름없어 작은 폭풍에도 무너지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 정상에 오른 자는 시대를 지배한다고 말이다.


사이토 도오산은 바로 그 "스스로의 역량으로 오른 군주"의 완벽한 현현(顯現)이다. 아니, 어쩌면 마키아벨리조차 이 정도의 극단적인 인물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로 삼았던 체사레 보르자조차도 '교황의 아들'이라는 막강한 아버지의 후광과 재력이 있었다.


하지만 도오산에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밑바닥 절간에서 쫓겨난 사내가 기름통을 메고 다니는 상인을 거쳐 한 나라의 절대 군주가 되기까지의 과정.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어쩌면 마키아벨리도 이론화하지 못한, 시대의 혼란을 먹고 자란 어떤 괴물적인 의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군주론』 18장에는 위대한 군주의 조건을 논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군주는 모름지기 사자와 여우의 자질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 사자처럼 힘으로 늑대들을 쫓아낼 줄 알아야 하고, 여우처럼 교활하게 함정을 꿰뚫어 보고 속임수를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도오산의 생애가 정확히 그러했다. 그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교토와 미노의 뒷골목에서는 함정을 파는 여우였고, 칼과 창이 부딪히는 전장에서는 적을 찢어발기는 사자였다. 상황에 따라 두 얼굴을 완벽하게 전환하는 능력에 있어서, 그는 마키아벨리가 종이 위에 스케치한 이상적 군주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고 완성된 버전의 인간이었다.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비인간적인 세계의 시작


『国盗り物語』1, 2권은 도오산이 숱한 피를 발판 삼아 미노의 지배자로 자리를 굳히고, 그 위태로운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 지점에서 끝을 맺는다. 이어지는 3, 4권은 이 늙은 살모사의 사위, 바로 일본 역사를 뒤바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이야기로 바통을 넘긴다.


그러나 우리가 노부나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훌륭한 스승이자 가장 두려운 적이었던 도오산을 먼저 깊이 읽어내야만 한다. 노부나가라는 불세출의 영웅조차도 결국 도오산이 창조해 낸 '실력주의와 파괴'라는 문법 위에서 자신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요괴』에서 그려진 응인의 난 전야의 교토가 보이지 않는 귀신들이 들끓으며 사람을 홀리는 기이한 세계였다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전국시대는 그보다 백 배는 더 무서운 세계다. 더 이상 세상을 떠도는 귀신 따위는 없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귀신보다 더 잔혹하고 무서운 짓을 웃으면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시대. 그리고 그 핏빛 무대의 한가운데에 가장 인간적인 욕망을 가졌으면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결단력을 지녔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름은 사이토 도오산. 그 전에는 나가이 신쿠로. 그 전에는 니시무라 간쿠로. 그 전에는 마쓰나미 쇼쿠로. 그리고 가장 처음에는 지혜 제일의 법련방. 만약 마키아벨리가 지구 반대편의 이 사내를 알았더라면, 아마 메디치 가문을 위한 『군주론』을 첫 장부터 다시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