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네의 언덕 (箱根の坂) 上中下
이 작품은 일본 중세의 끝자락과 근세의 여명을 연결하는 거대한 가교와 같은 작품이다. 전작인 『요카이(妖怪)』가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치세와 오닌의 난이라는 혼돈의 극치를 다루었다면, 이 작품은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무너진 옛 질서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싹을 틔운 풍운아 이세 소즈이(후일의 호조 소운)의 삶을 조명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5세기 후반은 일본 역사상 가장 처참하면서도 역동적인 '하극상'의 시대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교토는 정치적 기능을 상실한 채 귀족들의 허영만이 남은 도시가 되었다.
지방의 슈고 다이묘들은 서로의 영지를 잠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민중은 기근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해야 했다. 시바 료타로는 이 난세를 단순히 '전쟁의 시대'로 규정하지 않고, 낡은 장원제와 가문 중심의 가치관이 붕괴하고 실력 중심의 새로운 사회 계약이 태동하는 거대한 전환기로 묘사한다.
이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 이세 소즈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센고쿠 다이묘'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막부의 하급 관료인 이세 가문의 일원이었으나, 중앙의 부패와 무능에 환멸을 느끼고 동쪽의 간토 지방으로 하향한다. 당시 간토는 중앙보다 더욱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고, 소즈이는 이곳에서 자신의 지략과 담력만으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해 나간다.
일본 사학계는 그를 '전형적인 하극상의 화신'이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센고쿠 시대의 문을 연 선구자로 정의한다. 특히 그는 단순히 무력으로 땅을 뺏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지 내의 세금을 감면하고 법도를 세워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영국(領國) 경영'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소즈이의 여정에는 그의 야망을 뒷받침하거나 혹은 강력한 대척점에 섰던 인물들이 존재한다. 우선 소즈이의 누이인 기타가와 도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스루가(현재의 시즈오카현)의 강력한 슈고 다이묘인 이마가와 요시타다에게 시집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소즈이가 간토에 발을 붙일 수 있는 결정적인 정치적 교두보를 마련해 준다. 시바 료타로는 그녀를 단순히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라, 가문의 위기 상황에서 소즈이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는 강인한 인물로 묘사한다.
또한 소즈이의 조력자로서 다이도지 신로쿠로를 비롯한 '이세 7인방'이라 불리는 가신단은 소즈이의 실용주의적 군사 집단을 상징한다. 이들은 혈연이나 전통적인 주종 관계에 얽매이기보다 소즈이라는 인물의 비전과 능력에 매료되어 모인 집단이다. 이들은 소즈이가 간토의 험준한 지형을 공략할 때 첩보와 기습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후 호조 가문이 5대에 걸쳐 간토를 지배하는 기틀을 닦는다.
반면, 소즈이의 최대 라이벌이자 구체제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아시카가 차차마루이다. 그는 호리고에 구보(막부의 간토 통치 기구)의 후계자였으나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리를 찬탈한 폭군으로 그려진다. 차차마루는 명분과 혈통만을 내세우며 민심을 돌보지 않는 구시대적 지도자의 전형이다. 소즈이가 그를 무너뜨리는 과정은 단순히 한 무장이 다른 무장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력의 시대'가 낡은 '혈통의 시대'를 심판하는 역사적 상징성을 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소즈이가 이즈 국을 점령하고 오다와라 성을 탈취하는 과정이다. 시바 료타로는 이 전투들을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닌, 고도의 심리전과 정보전의 산물로 묘사한다.
이즈 토벌 당시 소즈이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기보다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친다. 그는 먼저 이즈의 온천 지대에 잠입하여 민심을 살피고, 차차마루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확인한다. 이후 공격을 시작하며 그는 "우리는 약탈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는 메시지를 전파한다.
실제로 점령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세금을 '4공 6민(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냄)'으로 낮춘 것이었다. 이는 당시 70~80%에 육박하던 가혹한 세율에 비하면 혁명적인 조치였으며, 이 '합리적인 통치'야말로 수천 명의 군대보다 강력한 무기였음을 시바 료타로는 강조한다.
이어지는 오다와라 성 탈취 장면은 소즈이의 기만전술이 정점에 달하는 대목이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오다와라 성을 얻기 위해 소즈이는 성주인 오모리 후지요리에게 낮은 자세로 접근하여 환심을 산다. 사슴 사냥을 핑계로 성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한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소 뿔에 횃불을 매달아 대군이 몰려오는 것처럼 위장하는 '화우계(火牛計)'를 펼친다. 밤의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횃불이 성을 향해 달려드는 광경은 적군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시바 료타로는 이 장면에서 소즈이의 대담함과 지략을 조망하며, 그가 단순히 운이 좋은 무장이 아니라 시대의 지형지물을 완벽히 이용할 줄 아는 천재적 전략가였음을 증명한다.
소즈이의 이러한 행보를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지점들이 발견된다. 그가 중앙의 질서를 등지고 변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세력을 일궈낸 과정은 후삼국 시대의 견훤이나 궁예와 비견될 만하다. 특히 견훤이 신라의 중앙 군대에서 시작했으나 스스로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걸어 독자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한 점은, 이세 소즈이가 간토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자신만의 '호조' 왕국을 건설해 나간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또한, 소즈이가 보여준 철저한 실용주의와 민심 수습책은 신라 말기 혼란을 틈타 호족 세력을 규합했던 궁예의 초창기 모습과도 닮아 있다. 다만, 궁예가 종교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다 파멸에 이른 것과 달리, 소즈이는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현실의 법도'와 '경제적 이익'이라는 합리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법령을 정비하고 합리적인 조세 제도를 운영했다는 측면은 조선의 기틀을 닦은 정도전의 경세가적 기질과도 연결된다.
소즈이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꿈꾸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현실 속에서 생존과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실용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를 지향했던 한국의 주류 영웅들과 달리, 각자도생의 시대에 스스로 질서가 되고자 했던 일본 센고쿠 영웅들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시바 료타로는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조감도적 서술 방식'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는 소즈이의 일대기를 단순한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당시의 지리적 특성, 경제적 배경, 심지어 당대인들의 식습관과 사고방식까지 세밀하게 복원해 낸다. 하코네 산맥이라는 지형적 장벽이 일본 역사에서 갖는 상징성을 분석하며, 소즈이가 이 장벽을 넘어 간토로 진출하는 과정을 마치 한 편의 입체적인 군사 지도를 보듯 설명한다.
작가는 소즈이를 영웅화하기보다는, 그가 처했던 시대적 한계와 그 속에서 발휘된 '합리성'에 집중한다. 소즈이가 이즈를 공략할 때 전염병을 이용하거나 민심을 동요시키는 심리전을 펼치는 대목에서, 시바 료타로는 이를 비겁한 술수가 아닌 '불필요한 살상을 줄이는 지혜'로 해석하며 그에게 현대적인 리더십의 그림자를 투영한다.
소즈이가 노년에 이르러 호조(北条)라는 성씨를 택한 것은, 과거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자였던 호조 가문의 정통성을 계승함으로써 간토 지배의 명분을 확고히 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자식들에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백성을 사랑하며, 항상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긴다. 이는 센고쿠 시대의 잔혹함 속에서도 피어난 '인본주의적 다이묘'의 원형을 보여준다.
『하코네의 언덕』은 한 개인의 성공 신화를 넘어, 낡은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올 때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적인 역사소설이다. 시바 료타로는 이세 소즈이라는 인물을 통해, 혼돈이란 곧 기존의 정의가 사라진 상태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정의를 세우는 자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전작 『요카이』가 시대의 종말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선이었다면, 본작은 그 종말의 재 속에서 불사조처럼 피어오른 개척자의 뜨거운 박동을 담아내고 있다.
하코네라는 (당시로서는) 험준한 언덕을 넘어 간토 평야를 바라보던 소즈이의 시선은, 오늘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곧 스스로의 힘으로 지형을 읽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자만이 역사의 거센 물결 속에서 침몰하지 않는다는 준엄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