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쿠젠바시, 강철과 안개의 다리

17세기의 강물, 21세기의 숨결

by KOSAKA

치쿠젠바시(筑前橋)는 오사카 도사보리강 위에 놓인 작은 다리다. 길이 69미터, 폭 14.6미터. 도심의 화려한 교량들 사이에서 자칫 지나쳐버릴 만큼 평범해 보이지만, 이 다리에는 오사카라는 도시의 시간과 권력, 그리고 감각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 시작은 에도시대 초. 지금의 나카노시마 서단에는 후쿠오카번, 곧 치쿠젠(筑前)이라는 지역의 쿠로다黒田) 가문이 창고를 두고 있었다. 쌀과 자산이 흘러들던 이 창고 앞에는 일반 백성이 건널 수 없던 ‘전용 교량’이 있었다. 바로 이 다리가 오늘날의 치쿠젠바시다. 당시 이름은 '筑前殿橋(치쿠젠도노바시)'로, 말 그대로 ‘치쿠젠의 영주를 위한 다리’라는 뜻이었다. 다른 번조차 마음대로 건널 수 없을 만큼, 이 다리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권위의 상징이자 영주의 특권 그 자체였다.


그러나 세월은 다리 위의 권세도 흘려보냈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번 체제가 해체되자 누구나 이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되었고, 1885년 태풍과 홍수로 목재 구조물이 통째로 유실되면서 다리는 기능을 잃었다. 당시 오사카부 기술국장이 남긴 말이 있다. “목재는 강물이 삼키고, 강철은 시대가 삼킨다.” 20세기 초 근대 도시계획이 본격화되면서, 도사보리강 일대는 다시 개발의 물결을 맞는다. 그리고 1932년, 도시계획 1차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강철 교량이 들어선다. 리벳 접합 방식의 3경간 거더교. 당시 설계자는 중앙 경간의 높이를 일부러 1미터 올려 부유물 통과를 확보했고, 난간은 리듬감 있는 곡선 구조로 마감해 ‘디자인도 기능의 일부’라는 철학을 담았다. 같은 시기에 지어진 나니와바시가 클래식한 석조 난간으로 구성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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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도시의 중심은 서쪽으로 옮겨가고, 치쿠젠바시는 또다시 조용해진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북측에 국립국제미술관, 남측에 오사카 시립과학관이 들어서면서, 이 다리는 하루 수만 명이 오가는 ‘문화의 가교’로 새로 태어난다. 오사카시의 야간 관광 자료에 따르면, 도톤보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야경 촬영 명소’가 바로 이 다리다. 21세기의 여행자들은 더 이상 권세의 행렬이 아니라, 카메라와 산책을 들고 다리를 건넌다.


사실 나는 이 다리를 매일 지나친다. 통근길이라 처음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안개 낀 날씨에 난간에서 수증기 같은 김이 피어오르는 걸 봤다. 순간 ‘강철도 숨을 쉰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빨갛게 녹슨 리벳 자국과 물방울이 엉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부터 나는 이 다리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저 통근길이던 곳이, 오사카의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접속지점처럼 느껴졌다고 하면, 지나친 감상이려나.


최근 치쿠젠바시는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나카노시마선 연장계획의 핵심 보행 축으로 지정되면서, 양단에는 자전거 거치소와 경사로가 생길 예정이다. 난간은 보강되고, 보행자의 접근성은 대폭 개선된다. 90년 전 근대 도시가 강철로 써둔 문장이, 이제는 사람의 리듬에 맞춘 문장으로 다시 쓰이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물처럼 흐르지만, 다리는 그 흐름을 건너는 기억으로 남는다. 치쿠젠바시는 오사카라는 도시가 자신을 어떻게 건너왔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상징이다. 바삐 걷는 아침에도, 어쩌다 멈춰 다리 난간에 손을 얹을 때면 나는 생각한다. 이 다리는 단순한 철판이 아니라, 몇세기를 건너온 리듬 그 자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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