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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저작권법의 공통점과 차이점

저작권법의 차이에서 보이는 문화적 감수성

by KOSAKA

일본에 근무하는 주재원으로서 2025년은 한일수교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만큼 양국의 저작권법을 비교해보면서 그 배경이 되는 양국의 문화적 차이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브런치스토리의 작가라는 위치에서 글을 쓰면서 저작권법을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오사카에 파견 근무 중이다. 다른 나라에서 일한다는 건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거리의 촉감, 사람들의 목소리, 회의실의 침묵까지도 낯설다. 하지만 그런 차이들 너머로 내가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것은, 이 사회가 ‘문장’이라는 것을 대하는 태도다.


거리에서 받은 광고 전단 한 장에도, 누가 쓴 문장인지 작게나마 이름이 새겨져 있다. 회사 회의록이나 안내문에서도 출처가 표기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처음엔 그런 정성이 조금 과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모든 표기가 단지 형식이 아니라—어쩌면 하나의 예의이자 질서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장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창작자’라는 존재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와 맞닿아 있다. 그 차이를 좀 더 이해해 보고 싶어, 나는 어느 날 한국과 일본의 저작권법 조문을 나란히 펼쳐보았다.


두 나라 모두 창작과 동시에 권리가 발생하는 ‘무방식주의’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법이 쓰이는 방식과 강조점에는 적잖은 결의 차이가 있었다.


한국의 저작권법 제28조는 인용에 대해 간단한 기준을 제시한다. “보도·비평·교육·연구 등 정당한 범위 내에서, 공정한 관행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많고, 융통성도 있다. 반면 일본의 제32조는 훨씬 조심스럽고 촘촘하다. 인용은 주된 내용에 부수적이어야 하고, 반드시 필요성이 인정돼야 하며, 출처는 명확히 밝혀야 한다. 모든 조건이 조문 안에 들어 있다.


그 차이는 단순히 조문의 길이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창작자’가 법과 사회 안에서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되고 있는가—그 깊은 문화적 태도가 문장 하나하나에 배어 있었다.


한국의 법은 창작물을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 정의한다. 일본도 비슷한 정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실제 적용에서는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일본은 창작물의 ‘정체성 유지’에 좀 더 민감하다. 표현이 단순히 새롭기만 해서는 부족하고, 그것이 작가의 세계관과 얼마나 밀접한가가 중요해진다. 한국은 조금 더 개방적이다. 누군가의 작업을 다시 보고, 해체하고, 조립해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행위 역시 창작으로 받아들인다.


법의 구조에서도 성격 차이가 묻어난다. 한국은 권리 보호 조항이 앞에, 제한 조항은 뒤에 있다. 창작자의 권리를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서야 예외를 허용한다. 반면 일본은 허용 범위를 먼저 정리한 후, 권리 보호를 이야기한다. 법을 읽는 순서가 곧 사고방식의 순서다. 무엇이 우선인가,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를 법이 먼저 가르쳐주는 셈이다.


이런 문화적 감수성은 성명표시권과 같은 저작인격권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법은 “저작자는 그의 저작물에 이름을 붙일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선 그 이름이 자주 빠진다. 발표 자료, 기사, 광고… 많은 문장들이 ‘누가 썼는가’를 생략한 채 흘러간다. 반면 일본에선 이름이 붙는 일이, 거의 의무처럼 여겨진다. 심지어 내부 문서나 인쇄물조차도 ‘출처’를 표기한다. 그것은 단순한 권리 보호가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과 목소리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기억의 질서를 지키는 일이다. 누구의 말이었는지 잊지 않으려는 작은 약속이자, 타인의 문장을 마주할 때 지켜야 할 거리감이다. 그 차이는 단지 법률 해석의 차원을 넘어, 창작을 대하는 사회의 기질로 연결된다.


일본은 원형의 형태와 문맥을 보존하려는 문화가 강하다. 원작자의 세계관은 하나의 완성된 구조로 여겨지고, 그것을 변형하지 않는 것이 ‘예의’로 통한다. 그래서일까. 팬아트, 2차 창작, 리믹스 문화는 일본에서 여전히 조심스럽다. 법도 그에 맞춰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작동한다.


반면 한국은 확장과 변형에 능하다. 짤방, 밈, 리믹스 영상 같은 재창작 문화가 활발하다. 물론 논란도 잦고, 권리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그 속엔 창작이란 완결이 아니라 ‘계속되는 행위’라는 믿음이 있다.


창작은 고유한 출발점이지만, 수많은 파생을 통해 진화해 간다는 생각. 이 두 흐름은 어느 하나가 옳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문장을 다루는 방식이, 그 사회가 기억하고 싶은 것과 지우고 싶은 것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런 문화와 제도의 틈새에서 나는 매일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남긴다. 처음엔 단지 내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기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문장들이 내 것이란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내 시선에서 나온 말들이고, 내 경험에서 솟아난 표현들이니까.


요즘은 생성형 AI가 일상을 바꾸고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 때론 사람이 만든 것보다 더 정교하게. 이 기술의 등장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창작자란 누구인가?” 기계가 만든 이미지와 문장이 진짜 창작물일까? 아니면 인간이 만든 원형을 모방한 환영일까?


결국, 저작권은 이 질문에 대한 사회의 답변이다. 법은 여전히 창작자가 유효하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시선에서 시작된 말에는, 그 시작점을 기억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법률가가 아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이방인으로서,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조금 다르게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법의 규정이 아니라, 타인의 문장을 어떻게 대하고 싶은가에 대한 태도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기록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본 세계를 내 방식으로 붙잡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내 문장이 누군가의 글 속에 인용된다면, 그 문장의 시작에 내 이름이 함께 적혀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기억의 질서이고, 창작이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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