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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미야모토 테루 《그냥 믿어주는 일》

이미 딴 곳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일...

  어쩌다보니 벌써 팔월의 마지막 날이다. 책장 옆에 세워진 캣타워에서 졸린 눈을 하고 있는 고양이 들풀을 빤히 바라보다 문득 떠올랐다. 오늘은 팔월의 마지막 날, 그리고 아버지는 팔월의 첫째날에 이미 어머니가 계신 요양 병원에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첫 번째 입원 과정에서는 완강한 거부의 제스처를 보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두 번째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은 것인지, 그러지 못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나는 어린 시절 공부를 싫어했고 운동도 잘 못했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서투른 데다 제멋대로에 울보에 병약하기까지 했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담임선생님이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배신하지 마라, 남의 것을 훔치지 마라. 이렇게만 교육하고 있습니다...” (p.93)


  미야모토 테루의 오래된, 짧은 산문들이 모여 만들어진 《그냥 믿어주는 일》에는 저자가 찰나의 순간에 만들어내어 가지를 뻗어가는 상상의 이야기들이 등장하고는 한다. 앞에 적은 내 아버지의 현재 상황이 모두 상상이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것은 일말의 허구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현재 상황을 과거에는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단 한 번도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을까. 


  “... 25년 전의 나는 그저 차창으로 바라본 눈보라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헌팅캡을 쓴 남자에 대한 건, 아마도 내가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겠지. 나에게는 그런 병이 있다.” (p.13)


  산문집에는 중구난방의 이야기드리 두서없이 실려 있는데, 저자의 아버지 이야기는 꽤 여러 번 등장한다. 책의 뒤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살펴보자니, 저자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 문제가 많았으며, 저자가 스물두 살 때 내연녀의 집에서 지내다 뇌경색으로 쓰러졌으며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산문집에 실린 글에서 저자가 아버지를 원망한다거나 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 많은 젊은이들이 그때 즐거우면 되는 것, 순간적으로 폭소가 터져 나오는 것밖에 추구하지 않게 되어 인간의 영혼과 인생의 거대함을 전하는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 좋은 소설과 대치하려면 나름의 정력이 필요한데, 그 정력과 그에 동반되는 노력을 아끼며 사회로 나간다.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무서운 일이다. 애석하게 여겨야 할 일이다.

  나는 아무 장점도 없는 인간이고, 머리도 나쁘고 완력도 없으며, 제멋대로에 겁쟁이에 질투가 심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내가 조금은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살짝 낮춰 대답할 것이다...” (p.53)


  저자 자신이 경마 도박에 꽤나 미쳐 있었다는 내용도 몇 번 등장한다. 저자가 어린 시절 경마장에 데리고 간 것도 아버지였다. 심지어 경마에서 돈을 딴 날이면 저자를 데리고 술을 마시며 유흥을 즐기기도 하였다. 저자의 어머니는 크게 화를 냈다. 여하튼 이미 결혼하여 아이도 있는 상태였던, 미야모토 테루는 결국 경마 도박으로부터 벗어났다. 대신 경주마를 소재로 한 《준마》라는 소설을 썼다. 


  “... 100년 뒤에도 야마모토 슈고로의 작품이 계속 읽히리라고 확신하는 나는, 머지않아 ‘요물’이 패배해 달아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도 확신한다. 야마모토 슈고로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믿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정교한 이론은 결국 늘 소박한 현실에 굴복한다.” (p.156)


  지난 주에 동생과 함께 두 분을 면회하였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우리와의 면회를 거부하며 병실에 계시겠다고 울기까지 하였다, 말씀하셨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를 알아보기는 하지만 여타의 상황 판단 능력은 대부분 상실한 아버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는 잠시 나와 눈을 맞추었지만 곧 고개를 외로 틀었다. 나는 이미 딴 곳을 보고 계신 아버지의 옆얼굴을 한참 바라보고, 돌아왔다.



미야모토 테루 / 이지수 역 / 그냥 믿어주는 일 / 프시케의숲 / 215쪽 / 2023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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