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토니 모리슨 《타인의 기원》

내가 누릴 수 있으니 당신도 누릴 수 있어야 해, 의 의지가 만연하길..

  그가 쓴 모든 작품을 읽은, 앞으로도 더욱 계속 읽고 싶은 작가들이 있다. 토니 모리슨도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내게는 줌파 라히리, 파스칼 키냐르, 제임스 셜터, 찰스 부코스키 등이 이러한 작가군에 속한다.) 나는 토리 모리슨을 향하여, “여성과 인종이라는 두 가지의 문제를 사실과 환상이라는 두 개의 차원에 교묘히 중첩시킴으로써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작품을 쓴다. 매 작품의 독서에서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토니 모리슨이 강연 시리즈를 시작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상대는 정치적으로는 경량급이라고 여겨지던 남성이었고 대세는 클린턴이 훨씬 우세했다. 이 모든 상황은 역사의 명령을 거스르고 마침내 ‘도덕적인 우주가 그리는 긴 원호의 끝에 있는 정의’라는 종점에 마침내 도달하려고 애쓰는 한 나라의 궤적을 증언하고 있었다(마틴 루터 킹 목사는 “도덕적 우주가 긴 원호를 그리지만 그 원호는 결국 정의를 향해 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옮긴이)

  그러던 중에 원호가 좀 더 길어졌다.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에 대한 첫 반응은 이 승리가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pp.6~7, 타네히시 코츠의 <추천의 글> 중)


  나는 약자를 향하는 선한 의지를 정의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토니 모리슨이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차별받는 인종 그리고 여성을 향하여 보여 주는 선한 의지는 그 자체로 정의롭다. 그러한 토니 모리슨이 《타인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책 안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미국 내의 흑인 차별이 어떤 마음으로부터 기인하였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기원은 많은 차별과 혐오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을 법하다.


  “... 고등 동물인 인간은 우리 부족 사람과 그 밖의 사람을 구분지은 뒤 상대를 적으로, 즉 취약하고 결핍이 있으며 통제가 필요한 대상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오래된 경향은 단순히 동물계나 선사시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피부색은 부, 계급, 젠더와 마찬가지로 다름을 판단하는 데에서 끊임없이 결정권을 행사해 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권력의 통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다.” (p.26)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권력의 통제의 필요’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 속하는 것과 우리에 속하지 않는 것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나눔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저 눈에 확 띄는 것이면 충분하였을 텐데, 생김새 그중에서도 피부색은 이러한 기준으로 삼기에 적당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 짓기는 통제의 방식으로 아직 그 시효가 소멸되지 않았다. 


  “인종은 특정한 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는 인류라는 종에 속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다 무엇인가? 적개심은 무엇이며, 사회적 인종차별은 무엇이고, 게다가 타자화란 대체 무엇인가? 타자화가 가진 매력, 그것이 주는 위안과 사회적·심리적·경제적 권력은 어떤 성격을 갖는가? 소속감을―‘나’라는 개별적 자아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그래서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암묵적인 의미를―느끼는 데서 오는 짜릿함일까?

  나는 일단 ‘이방인’이라는 것에, 그러니까 소외된 자아를 정의 내리기 위해서 우선 타자에 대한 사회적·심리적 요구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군중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외로운 사람이다).” (p.43)


  그리고 이러한 구분짓기는 타자화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방인을 상정하고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타자화의 주체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소속감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부여하게 될 것이고, 그 소속감의 원천에는 타자화의 객체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사회 경제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는 길지 않은 몇 편의 글을 통하여 이를 분석하고, 자신의 소설 몇 편을 가져와 이를 인증한다.


  “이방인은 바깥의 존재도 아니고 임의로 존재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억된 존재이다. 굳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그런 존재가 내 자아와 우연히 만났을 때 바로 경계심이 물결치듯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이 불러일으키는 모습과 감정, 특히 그 감정이 아주 심오할 때 비로소 거부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타자를 소유하고지배하고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타자의 마음을 빼앗아 내 자신의 거울 속으로 도로 데리고 들어오고 싶어 한다. 어떤 경우에든―경계심을 갖든, 헛된 존경심을 느끼든―인간은 타자에게 개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자신은 꼭 지녀야 한다고 고집하는 그 개인적 특성을 남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p.75)


  토니 모리슨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바를 향해 멈추지 않는 서술을 하는 작가였다. (작가는 2019년 8월에 88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이방인을 향하는 타자화와 이를 통하여 소속감과 안정화를 누리고자 하는 유혹이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이기도 하다. 나는 누릴 수 있지만 당신은 안 돼, 의 마음이 아니라 내가 누릴 수 있으니 당신도 누릴 수 있어야 해, 의 의지가 만연하길 빌어 본다.



토니 모리슨 Toni Morrison / 이다희 역 / 타인의 기원 (The Origin of Others) / 바다출판사 / 151쪽 / 2022 (2017)

매거진의 이전글 미야모토 테루 《그냥 믿어주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