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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세라 망구소 《300개의 단상》

혼연일체를 이루거나 아예 별개로 뻗어나가는...

  “나는 이 글들을 내 대표작이 되었으면 하는 작품을 써야 하는 시간에 딴짓을 하는 기분으로 쓰곤 했다. 이런 글을 300개나 쓰라는 임무를 나 자신에게 맡기는 건 토할 때까지 억지로 줄담배를 피우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나는 토하지 않았으니까.” (p.61)

  세라 망구소의 《300개의 단상》은 300개의 아포리즘을 모아 놓은 책이다. 책의 크기가 작고 얇아서 차의 뒷좌석에 툭 던져 놓았다가, 잠깐 짬이 날 때 허리를 틀어 책을 집어 자세를 고쳐 잡은 다음, 93.1에 주파수를 맞춰 놓고 몇 페이지 읽고, 다시 뒷좌석으로 툭 던져 놓았다가, 아버지 투석 병원 올라가는 길에 다시 집어서 가지고 올라가,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읽었더니 금세 다 읽어버렸다.

  “자신을 타인과 비교할 때 생기는 문제는 너무 많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타인 전체를 대조군으로 삼으면 당신이 가장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것과 가장 낙관적으로 바라는 것이 동시에 현실로 다가온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인 것처럼, 비정상인 동시에 다른 모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p.7)

  금세, 라고는 했지만 정말 금세, 는 아니고 짬짬이 읽다 보니 며칠은 걸렸다. 어떤 단상은 몇 번 눈을 깜박이는 동안 지나가기도 했지만 또 다른 단상은 몇 번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는 모자라 길게 시간의 공을 들여야 했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로 작가의 단상과 혼연일체를 이루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작가의 것과는 아예 별개일 수도 있는 나만의 단상을 만들어내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수업 시간에 여러 개의 자루에 든 온갖 뼈와 적갈색 공작용 점토 덩어리를 가지고 고양이의 뼈대를 조립한 적이 있다. 척추를 만들기로 한 내 친구는 뼈 사이사이에 서둘러 점토를 끼워 붙였다. 나는 턱뼈만, 딱 그 관절 하나만 붙들고 두 개의 뼈를 완벽하게 연결하려고 애를 썼다. 겨우 열 살밖에 안 됐을 때부터 나는 작은 일 하나라도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사실 내가 지금껏 별로 변하지 않았으며 변화 같은 건 전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p.21)

  책에 있는 단상이 모두 예리하고 깊어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진부한 것은 진부한 대로 단순한 것은 단순한 대로 나름의 접착면 같은 것이 있어서, 읽고 생각하기에 부적합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작가의 단상들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책을 읽었다.

 

  “누군가가 당신을 모욕하거든 그 모욕을 칭찬으로 알아들은 척하라. 그러면 그 사람을 몹시 화나게 할 수 있다.” (p.35)

  작은 생각조차 붙들고 있기 어려울만큼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얇은 책을 읽을 때 더 빨리 시간이 가고 두꺼운 책을 읽을 때 시간이 조금 더 더디게 흘러간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니까 세라 망구소의 두 권의 책을 읽는 동안에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해가 바뀌었구나 2023년이 되었구나, 라며 절절히 감응할 새도 주지 않고 바야흐로 2월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적응을 잘 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자기 삶 한구석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여기저기로 골고루 분배한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다.” (p.41)

  그렇게 해가 바뀌고 쉰다섯 살이 되었다. 현 대통령이 한 살을 깎아 준다고 했다는데 어쩌면 그의 재임기간 중 유일한 치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의 은총을 등에 업는다고 하여도, 나의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는 올해 모두 쉰 살이 넘어버렸다. 병원 가는 길에 이 사실을 넌지시 아버지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한바탕 크게 웃다가 곧바로 정색을 하더니 말했다, 무섭다 야...

  “마흔 살이 되면 우리는 비극적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사람으로 갑작스레 변하고 만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 기회는 있다. 대단히 흥미로워질 만큼 장수하다가 죽을 기회가.” (p.90)

세라 망구소 Sarah Manguso / 서제인 역 / 300개의 단상 / 필로우 / 123쪽 / 20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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