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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모두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죽음, 그 죽음을 대하는...

  2023년 1월에 쓴 글이다.


  설을 한 주 앞두고 여동생 내외가 부모님 댁에 들러 이틀 밤을 지내고 돌아갔다. 그 밤들 중 한 날 아버지가 토사곽란에 시달렸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화장실에 들어갔던 엄마 또한 주저 앉아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 밤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란 여동생이 내 출근 시간을 기다렸다가 전화를 해 그 모습을 상세히 설명했다. 자신들이 아니었다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었다며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기세였다.


  나는 동생의 말이 시작될 때 잠깐 미간을 찌푸렸지만 동생의 말이 계속되면서 점점 차분해졌고, 동생이 거친 호흡과 함께 말을 끝마쳤을 때는 거의 평정의 상태가 되었다. 곧 그리로 가겠다는 말과 함께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거기에는 죽음의 상황도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와 나는 어떤 상황도 어떤 죽음도 받아들일 준비를 이미 오래전 끝내놓은 상태라는 말이었다. 


  사 년 전 폐암 4기 선고를 받은 이후 병원을 오가는 동안 아버지는 내가 운전하는 차를 이용했다. 지난해 인지 저하 판정을 받고 희귀암의 방사선 치료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세 달 전부터는 일주일에 세 번 투석실에 들러야 할 때도 아버지는 대부분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탄다. 폐암을 선고받고 얼마 뒤 나는 아버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팔십 초반까지 살았으면 좋겠고, 고통 없이 떠났으면 좋겠다고 답하였다.


  인지저하가 시작된 작년 봄 이후 아버지는 주말을 제외한 모든 평일에 내 차를 이용해야 했다. 아버지는 작년 한 해 동안 따로 혹은 동시에 종양내과, 피부과, 신경과, 신장내과, 방사선종양학과, 피부비뇨기과, 치과 진료를 받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인지저하로 순한 아이가 된 아버지는 영문을 모른 채 그 많은 병원의 진찰실과 입원실에 들러야 했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안심시켜야 했기에 더욱 수다스러워져야 했다.


  아버지는 차에 타면, 지금 자신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 투석 병원에 가는 중이에요, 왜 가는지, 신장 기능이 나빠져서 기계가 그 기능을 대신해야 해요, 묻는다. 투석이 끝나고 집으로 모시려고 병원에 들르면 또, 여기가 어디인지, 투석 병원이에요,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기계를 통해서 피를 교체해 주어야 힘을 내서 엄마의 집안일을 도울 수 있어요, 묻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병원이 18층에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란다.


  부모님 댁에 도착하여 놀란 동생을 안심시킨 다음 아버지와 엄마를 살폈다. 아버지는 내가 있는 동안 한 차례 더 토하였고, 나는 투석 병원에 전화를 해 상황을 알렸다. 투석은 다은 날로 미뤄졌고 나는 병원에 들러 장염약 처방을 받아 돌아왔다. 장염약을 드시게 한 후 죽집에 들러 아버지가 드실 죽을 사왔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것을 확인한 후 여동생과 함께 투석이 가능한 요양 병원에 들러 면담을 하고 돌아왔다.


  그 이후 이 책,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내내 읽었다. 매일 목도하고 있는 내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상황과 (내 아버지를 비롯하여 이후 나도 포함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앞둔 그들이 대면할 이 사회의 시스템을 들여다보았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실린 내용들은 대부분 내가 앞으로 내리게 될 결정들에 영향을 끼칠만한 것들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 것 같지만 그렇다.


  나는 부모님과 관련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섣부르지 말아야 하지만 또한 마냥 유예를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삼남매의 맏이, 라는 지위(?)를 요즘만큼 실감해본 적이 없다. 사소한 결정과 중요한 결정, 결정의 초입과 결정의 중간 단계 그리고 최종적인 결정에 내가 필요해졌다.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쇠락한 부모를 모시는 일이 처음이지만 그렇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최근의 아버지의 칭찬들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두 기둥 사이에 차를 대느라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는 내게 아버지는, 너는 참 섬세하구나, 칭찬했다. 투석 병원의 간호사들에게 줄 선 선물로 쿠키를 준비한 내게 아버지는, 너는 참 생각이 깊구나, 칭찬했다. 칭찬이 자식을 망치는 길이라 생각한 대다수의 아버지들처럼 내 아버지 또한 평생 칭찬을 해본 적이 없으셨는데...  


  내 또래의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책에 나오는 허약 시기 노인들에 나이든 부모님을 대입하여도 되지만 나 자신이나 나의 배우자를 위치시켜 놓아도 상관없다. 권할만하다는 의미에서 책의 많은 부분을 발췌하여 아래에 덧붙여 놓았다. 이것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책이 지향하는 대략의 맥락은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에휴, 남의 일이 아니다...

  

  “현대 과학 기술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삶을, 더 오래 누리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의학계에서 일하는 우리들은 이 문제를 다룰 준비가 놀라울 정도로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현실이 대체로 주목받지 못하는 까닭은 삶의 마지막 단계가 점점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이 비율은 17%로 줄었다...” (pp.18~19)


  『노인병 전문의 실버스톤 박사에 따르면 “노화 과정에 관여하는 단일하고 일반적인 세포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리포푸신과 활성산소로 인한 손상, 무작위로 벌어지는 DNA 변형, 그리고 수많은 여타 미세포상 문제가 축적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점차적이면서도 가차 없이 진행된다.

  실버스톤 박사에게 노인병 전문가들이 재현 가능한 특정 노화 경로를 식별해 냈는지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뇨,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그저 허물어질 뿐입니다.”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로 적응해가며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p.49)


  『“꼭 그래야 하나요?” 신발과 양말을 벗어 달라는 요청을 받지 할머니가 물었다.

  “네.” 블루다우 과장이 답했다. 할머니가 진료실에서 나간 후 그가 말했다. “항상 발을 봐야 해요.” 그는 나비 넥타이를 맨 날렵하고 건강해 보이는 신사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발을 보는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났다. 그 신사는 손이 발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힐 수가 없어서 몇 주째 발을 씻지 않고 있었다. 전체적인 관리 부재를 보여 주는 것이자 현실적인 위험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pp.69~70)


  “... 매년 35만 명의 미국인이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는다. 그중 40%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고, 20%는 다시 걷지 못했다. 넘어지는 데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이 있다. 균형 감각 쇠퇴, 네 가지 이상의 처방약 복용, 그리고 근육 약화다. 이런 위험 요인을 가지지 않은 노인이 1년 사이에 낙상할 확률은 12%다. 반면 이 요인들을 모두 가진 노인의 낙상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 (p.70)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필립 로스는 소설 《에브리맨Everyman》에서 이를 더 비통하게 표현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대학살이다.”』 (p.94)


  “오늘날과 같이 의료화된 시대에 장애가 있고 노쇠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기술적인 면에서나 일상생활 면에서나 엄청난 임무다. 루 할아버지가 복용해야 하는 수많은 약들을 모두 파악하고 분류하고 다시 채우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다. 또 만나 봐야 하는 전문의들은 어찌나 많은지 다 모아 놓으면 소대 하나는 된다. 거기에다 어떤 의사는 매주 만나야 하고, 각 의사들은 계속해서 검사와 촬영을 하며 다른 전문의를 만나야 한다고 추천한다...” (p.139)


  “...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댈 수 있는 대가족이 함께 지내면서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 수 있게 지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통제와 감독이 계속되는 시설에 갇혀 사는 수밖에 없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다.” (p.172)


  “... 여기서 말하는 통찰이란 바로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너무 깊이 개입해서 손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개념이 날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환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어려운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고치려 애써야 할 때는 언제이고, 그러지 말아야 할 때는 언제일까?” (p.232)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다. 조사를 해 보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p.240)


  “과거에는 보통 죽어 간다는 것이 급격하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조기에 질병을 찾아내는 정밀 촬영, 생명을 연장시키는 처치 등 현대 의학의 개입 없이도 본래 투병 기간이 길어지는 질병이 있기는 했다. 아마도 결핵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를 대까지 며칠에서 몇 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pp.240~241)


  “... 1945년에만 해도 집에서 임종하는 경우가 단연 과반수를 차지했던 것이 1980년대 말에는 17%에 그쳤다가, 1990년대부터 다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호스피스 케어를 이용하는 빈도도 점점 늘어나 2010년에는 미국인 사망자의 45%가 이 서비스를 받다가 임종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중 절반 이상이 집에서 호스피스 케어를 받았고, 나머지는 호스피스 전문 시설 혹은 요양원에서 받았다...” (p.296)


  “... 우리는 통증 지속 시간이 짧은 쪽보다 긴 쪽이, 그리고 평균 통증 척도가 낮은 쪽보다 높은 쪽이 더 나쁠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환자들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최종 척도를 평가할 때 통증 지속 시간은 대개 무시됐다. 대신 최종 척도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지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카너먼 박사가 말한 ‘정점과 종점 규칙Peak-End rule’이다. 이는 가장 아팠던 순간과 마지막 순간에 느낀 통증의 척도를 평균 낸 것이다...” (p.362)


  『삶의 마지막 단계를 제어할 수 있다는 개념을 제안한다는 것은 보통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을 진정으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물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용기란 이 두 가지 현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힘이다. 우리에게는 행동할 여지가 있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범위가 점점 더 좁아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려면 몇 가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첫째, 우리가 병들고 노쇠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서 가장 잔인하게 실패한 부분은 이것이다. 그들이 단지 안전한 환경에서 더 오래 사는 것 이상의 우선순위와 욕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둘째,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나갈 기회를 갖는다는 건 삶의 의미를 지속시키는 데 매우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셋째, 우리에게는 삶의 마지막 장에 남아 있는 가능성을 혁신적으로 바꾸기 위해 제도와 문화, 그리고 대화 방식을 변화시켜 나갈 기회가 있다.』 (pp.370~371)


  “이른바 기술 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학자들이 ‘죽는 자의 역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p.380)



아툴 가완디 Atul Gawande / 김희정 역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Being Mortal) / 부키 / 400쪽 / 2015, 20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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