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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교사라는 동양적 전통을 구현하는 거의 완벽한 방식...

  아내는 좀처럼 자신이 읽은 책을 내게 (다른 누군가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아내는 (적어도) 나만큼 책을 읽고, (적어도 예전에는) 간단하게 리뷰를 작성하곤 하였다. 하지만 아내는 누군가에게 공개되는 어떤 블로그(류의 무엇도)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저 자신이 읽은 것을 자신(만 볼 수 있는)의 노트에 꼬박꼬박 적고는 하였다. (그러고보니 내가 알고 있는, 아내와 같은 은둔형 독서가로는 까페 여름의 C형도 있다.)

  “도착한 배송 꾸러미는 따뜻하고 뭔가 마법에 걸린 물건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그 안에 보물지도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스테이크 나이프로 포장 테이프를 자르니, 금박으로 새겨진 글씨가 희미한 빛을 내는 올리브색 책 두 권이 나왔다. 나는 큰 주전자 가득 커피를 만들어 1권을 무릎에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이로써 혼돈에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파헤칠 모든 채비가 끝났다.” (p.20)

  그런 아내가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두고, 내게 몇 번이나 읽었느냐고 물었다. 좋은 책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므로, 책장 어딘가에 있던 책을 꺼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물고기와 관련한 자연과학 도서인가 짐작하였는데, 책의 서두에서 이미 예측을 벗어난다. 저자는 일단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저서 《한 남자의 나날들The Days of a Man》을 구매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pp.141~142)

  책을 읽는 동안 아내와 내가 동시에 애정하는 작가 두 명이 떠올랐다. 빌 브라이슨과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들이다. 빌 브라이슨은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최대한 대중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고, (세계 3대 전기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 속의 인물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처럼 (그 심리까지 더하여)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책을 읽고 이들을 동시에 떠올렸으니 아내가 연거푸 나의 독서를 채근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였다.

  “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자서전을 덮었다. 2권이자 마지막 권인 올리브색의 책...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p.208)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집중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이 가진 불완전한 혹은 불온한 모습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크게 흥분하여 ‘보물지도라도 담겨 있는 것’ 같았던 책이 자신을 배반했을 때, 우리라면 저 멀리 책을 치우고 말았을 테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쩌면 반면교사라는 동양적 전통이 완벽하게 구현된 결과물이다.

  “... 민들레 법칙...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pp.226~227)

  과학 전문 기자인 저자의 문장 구사 방식에도 나는 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추운 2월의 오후, 나는 작은 자주색 차를 몰고 워싱턴 DC로 갔다... 나는 매일 걸어서 출근했다. 하루는 강도를 당했다. 하루는 서른 살이 됐다...’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나는 지금 무심하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거기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도 될 것이다, 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하다.

룰루 밀러 Lulu Miller / 정지인 역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Why Fish Don’t Exist: A Story of Loss, Love and the Hideen Order of Life)) / 곰출판 / 20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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