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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철 《사막에 묻힌 태양》

온전한 황폐만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역설의 공간 사막...

by 우주에부는바람

*2014년 11월 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얼마 전 만난 후배는, 내후년쯤 함께 여행을 가자고 설득하였던 후배는 자신이 가고 싶은 여행지로 아프리카 북쪽을 꼽았다. 그 여행 루트 안에 이집트가 들어 있었다. 얼마 전 선배는, 내후년쯤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합의한 선배는 모름지기 여행기, 는 이라고 하며 학고재에서 나온 이 여행기 중 하나인 김명인의 《잠들지 못하는 희망》이라는 책을 권하였다. 최수철의 《사막에 묻힌 태양》은 ‘세계문화예술기행’이라는 테마로 학고재에서 발간된 그 시리즈에 속하는 또 다른 책이다.


“그러고 보면 시대를 넘어서서 아름다움 주변에는 항상 드라마가 있기 마련이다. 그 드라마야말로 세상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방식이다. 아름다움이 드라마를 일으키므로, 우리는 아름다움을 통해 세상과 인생을 배운다. 어쩌면 그것은 일상의 모래에 덮여 버리는 우리들 삶 속에 들어 있는 유일한 진리이자 힘인지도 모른다...” (p.27)


그런데 김명인의 그것과는 달리 글 속에 드라마가 없다. 저자가 이미 정확하게 알고 이는 것처럼 드라마를 일으키는 데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의 여행기를 읽는 동안 그가 어떠한 아름다움에 감흥하고 있다고 볼만한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는 계속해서 혼란스러워 한다. 이집트에서 만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에게서 받은 감흥을 아름다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그 혼란스러움은 드라마로 발화되지 못한다.


“... 차도와 인도의 구분도 없이 흙으로 덮이고 잡동사니들이 함부로 널려 있는 길, 먼지로 가득찬 대기,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자동차들, 그 앞으로 유유히 지나치는 당나귀들, 이리저리 한데 몰려 뛰어다니는 맨발의 어린아이들, 차도르나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싼 채 눈만 내놓고 있는 비만한 체구의 여인들,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오는 소리, 인간 사회가 만들어 내는 온갖 소음들. 그런 모습을 놓고서 활력이라는 말을 떠올려야 하는 것인지, 그저 아수라장이라고만 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p.39)


어쩌면 그것은 그가 이집트 여행에 앞서 책으로 받아들인 아랍인들에 대한 편견에서 기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행에 앞서 앞으로 여행하게 될 곳에 대한 사전 지식을 어떤 경로로 어떤 방식으로 어느 만큼 갖는 것이 적당할지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편견을 이집트 땅에서 직접 확인하고 그것을 고정시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고착화를 위하여 어쩌면 편견일 수도 있을 그것에 어떤 합리화의 장치를 부여한다.


“《아랍, 아랍인》이라는 책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철저히 조직의 체계를 따르기 때문에 개인의 사생활이 따로 없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배려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들은 남들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는 것을 오히려 배려와 친절로 간주한다... 그들에게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항상 전면적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순한 저의를 가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가 남에게서 호의를 받으면 반드시 거기에 보답을 하려 하고, 반대로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 나면 반드시 거기에 대한 보답을 받으려 한다. 그런가 하면 가난한 사람은 부자에게 ‘바쿠시시’ 즉 희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부자는 빈자의 요구에 응할 의무를 가진다.” (pp.31~32)


어쩌면 여행기를 써내야 하다는 일련의 당위가 저자로 하여금 이처럼 가슴이 아닌 머리를 앞서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문구가 이번만큼은 오히려 저자의 발목에 족쇄처럼 휘감긴 것일 수 있다. 너무나도 분명한 목적의식은 오히려 여행하는 우리들 사유의 시선을 편협하게 만들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최수철의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그처럼 여행을 하는 우리들이 겪을 수 있는 또 다른 실수에 대한 타산지석일 수도 있다.


“나의 사전 지식으로 이집트의 역사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뉠 수 있었다. 시대순으로 따져서 간단히 말하자면 파라오가 지배하던 고대 이집트 왕국 시대, 그리스인 왕조가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 로마의 속국이 되었던 로마 제국령 시대, 아랍인의 점령에 의한 이슬람 시대가 그것이었다. 그 와중에 이집트에서는 멤피스, 타니스, 테베, 아스완,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등등의 도시들이 흥망을 거듭했다.” (p.35)


이집트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유물들 그리고 그 유물들에 속하는 역사의 토막들이 산문집에 널려 있지만 그것은 조금은 폐허와 같다. 이미 말한 것처럼 제대로 드라마화 되지 못해서일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이집트로는 여행을 가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애써 분한 기운을 누르며 적어 가고 있지만 그가 그곳의 사람들에게서 느꼈을 불쾌함이 (비록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간간히 좋은 기억을 포함시키려 애쓰고 있지만)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의 여행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지금은 그때와는 다를 것이야 넘겨 짚고 싶지만) 그곳이 얼마나 더디게 변화하는 곳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숨을 곳도 몸을 가릴 곳도 없는 그곳에서, 나의 몸은 마치 발가벗은 듯했고, 나의 정신도 또한 햇살에 허옇게 노출되어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떤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몸도 정신도 모두 벗겨져 나간 채 나는 투명한 막 같은 것으로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막을 영혼의 고장으로 생각한 것도 이와 같은 느낌 때문이었을까...” (p.202)


그렇다고 해도 그곳 이집트를 광범위하게 둘러싸고 있는 사막, 그 사막 같은 땅 위에 빈번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선조 인류의 먹먹함 자아내는 결과물인 건축물들을 둘러 보고 싶다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 건축물들 보다 오히려 그것들이 자리 잡고 있는 사막에 더욱 마음이 간다. 마음이 가지만 그 마음이 다다랐을 때 온전한 황폐만이 위안할 수 있게 되는 아이러니의 공간, 나는 그런 공간에 도달하고 싶은 것이다.



최수철 / 사막에 묻힌 태양 / 학고재 / 1996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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