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해버린 희망의 원리를 찾아서 떠나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여행...
책을 먼저 읽은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여행기를 쓰려면 이렇게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싶더라. 아마도 선배의 말에는 흔하디 흔한 요즘의 중구난방 하는 여행기와 비교하였을 때, 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을 법하다. 선배의 말에 고무되어 집어든 김명인의 책을 모두 읽고 나니 선배의 말에 일정 정도 수긍하게 되었다. 자잘한 일정들을 위시하여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라는 기본적인 여행기의 소스는 유지하고 있지만 김명인의 여행기는 묵직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운동법칙과 존재방식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해냈으면서도 그 분석에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이라는 목적론을 결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론적 곤경에 빠지게 된 측면이 있었다. 의지나 희망이 과학을 간섭한 것이며 철학이 사회과학을 대신한 것이었다. 현실의 연옥은 과학의 눈으로 해명했지만 목적의 왕국의 구체적 모습과 그 왕국으로 가는 사다리, 즉 매개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는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못하고 그저 ‘필연과 자유의 변증법’이라는 일종의 궤변으로 대체하였다는 점에 그와 나는 동의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의 분석에서 미래를 향한 행동의 예시가 도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 대해선 그도 나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p.181)
특히나 어린 시절 진영 내부에 위치하고 있던 이 평론가의 글을 읽었고 (지금은 가물가물한 ‘민족문학논쟁’의 불씨를 당겼다는 <지식인 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민족문학의 구상>과 같은 류의 글을...), 그가 하였던 고민과 나름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청춘을 보냈다고 할 수 있으니 더더욱 심드렁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일이 마치, 이제는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고 품평되는 유물론, 그 유물론의 창시자를 비롯해 그 유물론의 적자와 서자들이 즐비한 독일이라는 나라를 여행하는 저자와의 동행길과도 같았다.
“삶의 필연적 요구와 맞닿아 있지 않은, 목적이 모호한 여행길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후배들을 두고 이런저런 비평이나 하며 타국 땅에서 스스럼없이 이들을 불러내 과객질을 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다시 묻자, 왜 독일여행을 나섰는가? 독일을 알기 위해서? 독일을 거울 삼아 우리 한국의 상을 비추어보기 위해서? 엄혹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 머나먼 나라에까지 와서 삶 전부를 걸고 있는 후배들 앞에서 이런 한가한 여행은 부끄럽지 않은가.” (pp.232~233)
현실사회주의가 결단나고 냉전의 최전방이던 동서독 분단의 벽이 허물어지고 난 후, 믿고 의지하였던 패러다임의 쇠퇴를 한 발 늦게 확인하여야 했던 변방의 지식인의 여행은 그래서 독일의 겨울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해 보인다. 관광철이 아닌 독일 땅에서 이 여행객은 번번이 닫힌 문 앞에서 돌아서야 하는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이다. 우연찮게 어떤 마르크시스트(에른스트 블로흐)의 무덤에 적혀 있는 ‘사유는 경계를 넘는다 - 희망의 원리’라는 묘비명과 같은 수확이 없었다면 더욱 흐린 여행길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스스로는 늘 마르크시스트였지만 동구와 서구의 지식인들로부터 동시에 비판받은 사람이었다. 서구 지식인들은 그를 일컬어 ‘마르크스시트적 셸링’ 혹은 ‘악마적 유물론자’로 불렀고, 동구 지식인들은 그를 ‘예언자적 수정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는 마르크시즘의 가장 위대한 특징을 끝없는 갱신과 그를 가능하게 하는 개방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마르크시즘을 즉각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하나의 현실적 프로그램으로서가 아니라(대개 이렇게 보는 데서 모든 현실 사회주의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 즉 그의 표현대로 하면 유토피아적 희망의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p.83)
1995년 12월 27일 수요일날 그러니까 출발 하루 전을 프롤로그 삼아 시작된 여행은 1995년 12월 28일 서울을 출발하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1996년 1월 21일 다시 서울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 사이 그는 슈트트가르트, 튀빙겐, 트리어, 본, 퀼른, 괴팅겐, 프랑크푸르트, 빌레페트, 베를린 드레스덴, 프라하 (하지만 여행기 내부에 프라하에서의 일정은 다루고 있지 않다.), 뉘른베르크를 거쳤고, 에른스트 블로흐, 마르크스, 케터 콜비츠,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과 마주쳤다.
“... 역사적 필연과 인간적 자유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당위론과 그 근본적 이율배반성에 대한 인식 사이의 갈등은 마음의 불씨로 남아 있지만 일단 현존하는 사회주의가 바로 필연의 왕국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모든 탈출자들의 알리바이는 성립되었다. 그들의 탈출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 거짓 필연의 강제를 이기는 과정이었다. 물론 그들이 탈출한 곳이 유토피아일 리는 없다. 그들은 또 다른 강제가 지배하는 가짜 자유의 나라로 탈출한 것이었다. 프라이팬에서 뛰어나와 장작불 속으로 뛰어들기. 대부분의 탈출자들이 걸어간 길은 그런 것이었다. 이 세상에 진정 자유로운 곳은 없다. 자유를 위하여 깨어 있는 사람에게만, 깨어 있는 그 순간, 그곳에서만 인간은 자유롭다.” (p.286)
모름지기 여행기, 라는 것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사유’의 ‘경계’를 넘어 ‘희망’을 품은 하나의 ‘원리’로 이어질 여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자유로운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어야만 할 것이고,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공간을 지향하는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모름지기, 여행이라는 것을 한 번쯤 꼭 해보고 싶다.
김명인 / 잠들지 못하는 희망 : 세계문화예술기행 독일 / 학고재 / 349쪽 / 1997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