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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외 《안녕 다정한 사람》

이 매크로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 마이크로한 삶의 어정쩡한 다정함이여...

by 우주에부는바람

*2014년 6월 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어제부터 내내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비 내리는 카페 여름에 앉아 나무의 끄트머리, 잎을 타고 내려왔던 애벌레를 선배와 함께 바라보며 걱정했다. 그러나 곧 애벌레는 꿈틀꿈틀 온전히 제 몸뚱이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아마도 제 몸뚱이에서 나왔을 실 같은 무언가만을 이용하여 도로 나뭇잎으로 올라갔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이따금 이러한 시간을 일종의 여행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비행기로 열 시간, 그런데도 호주와 한국의 시차는 한 시간밖에 나지 않았다. 지도에서 볼 때 가로로 이동한 게 아니라 세로로 아래를 향해 내려왔던 것이다. 시간이란 세계를 세로 방향으로 나누어 정한 것이다. 시차가 곧바로 거리차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통념이 깨지는 것도 여행의 신선함 중 하나이다. 생각이든 몸이든, 익숙한 것들을 떠나 낯섦을 찾아 떠나는 것이니까...” (p.17) 은희경의 <애인 만나러 호주에 갔지요, 그의 이름은 와인이고요 흠뻑 취했답니다, 저 풍경 때문에> 중


소설가인 은희경과 김훈과 백영옥과 신경숙을 비롯하여 시인인 이병률, 영화감독인 이명세, 뮤지컬 음악감독인 박칼린, 요리사인 박찬일, 뮤지션인 장기하와 이적이 각각 일주일에서 보름 사이의 시간 동안 여행을 하고, 그 여행에 동참한 것으로 보이는 시인 이병률이 사진을 찍어서 만들어낸 여행 산문집으로 그들이 여정으로 삼은 장소는 호주, 태국, 핀란드, 홍콩, 미크로네시아, 뉴칼레도니아, 일본, 런던과 리버풀, 뉴욕, 퀘벡 등이다.


물론 실려 있는 글의 함량이 흡족하지는 않다. (나는 이처럼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기획된, 여러 명의 저자가 그 의도에 맞춰 글을 쓴 산문집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이처럼 기획된 책에 실린 글에 의해 감화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구매한 것은 아마도 그 안에서 김훈의 이름을 발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김훈의 명징한 사유가 담백한 문장으로 조각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우니까.


“나에게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이다. 계절에 실려서 순환하는 풍경들, 노동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지나가는 것들의 지나가는 꼴들, 그 느낌과 냄새와 질감을 내 마음속에 저장하는 것이 내 여행의 목적이다... 내 느낌은 대부분 언어화되지 않는다.” (p.159) 김훈의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미크로네시아서 깨닫다> 중


책에 실린 여행지 중에서는 미크로네시아와 뉴칼레도니아가 기억에 남는다. 휴식이 필요한 것인가 싶다.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는 것과 휴식은 아마도 차이가 있나보다. 크게 나를 혹사시키지 않으면서 잘 살아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싶다. 문명으로 인한 폐허마저 끌어안아 자연으로 되돌려버리는 미크로네시아나 세상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파랑으로 무장하고 있는 뉴칼레도니아에서라면 힘을 내어 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짐짓 모른 체 사지의 힘을 풀고 하늘을 바라보며 바다에 떠 있다보면, 하늘 바라보는 것조차 귀찮아 눈을 감고 있을라치면, 현재의 내 몸과 마음에 동행하고 있는 끈적한 시간들을 조금 덜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비워진 시간 안으로 세상에 나 하나 뿐이라는 적막감을 밀어 넣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내가 소유하려고 혹은 소유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많은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을런지도 모른다.


“... 그들은 가난했지만 숲에서는 먹을 것을 쉽게 구할 수는 있었다. 그들의 가난을 무소유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무소유는 소유가 있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개념이었다.” (p.181) 김훈의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미크로네시아서 깨닫다> 중


뜬금없이 고양이 들녘이를 떠올린다. 두 개의 방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온 생애를 살아내고 있는 고양이 들녘이는 지난 주 그 중 한 방에 갇힌 채, 물론 들녘이가 좋아하는 방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바로 그 방에 갇힌 채 낮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와 아내가 없는 사이에 욕실 공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은 삼일 정도였고 이제 들녘이는 두 개의 방을 온종일 오고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들녘이는 그 방을 거부하고 있다. 마치 무언의 항변이라도 하는 것만 같다. 자신의 작은 세상마저 임의로 더욱 축소시켜야만 했던 나를 향하여...



안녕 다정한 사람 / 글 은희경, 이명세, 이병률, 백영옥, 김훈, 박칼린, 박찬일, 장기하, 신경숙, 이적 / 사진 이병률 / 달 / 355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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