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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27. 2024

한병철 《시간의 향기》

'만인의 노예화'를 재촉하는 시대에 '한가로움의 민주화'를 주창하는...

  저자의 책 <피로 사회>에서 받은 좋은 느낌의 여운이 강하여 그의 첫 번째 책인 <시간의 향기>를 오래 전에 샀으나, 그것을 한 친구에게 선물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나 <시간의 향기>를 다시 샀고, 그러고도 이런저런 책들을 읽느라 팽개쳐 놓았다가 막상 읽어야지 할 때는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또 한참을 미루었다가, 이제야말로 읽어야지 침대 맡으로 옮겨 놓고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가...


  책은 현대인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그리고 현대인의 시간에 누락되어 있거나 현대인이 시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저자의 명민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향기’라는 책의 제목은 그렇게 모자라고 잘못된 현대인의 시간에 우리가 부여해야 할 어떤 부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책은 얼핏 보면 알 것 같다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뒤로 물러서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심하고 들여다보기 보다는 조금 뒤로 물러서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 또 이 책의 특징이기도 하다. 실은 그렇게 조금 뒤로 물러서서 (허투루) 읽었다.


  “... 충만한 삶은 그저 양적 논리로 정의되지 않는다. 온갖 삶의 가능성들을 실현한다고 자연히 충만한 삶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건들을 단순히 헤아리고 열거한다고 저절로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가 되려면 의미를 빚어내는 특별한 종합이 필요하다. 사건들의 장황한 나열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면 아주 짧은 이야기라도 고도의 서사적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극히 짧은 삶도 충만한 삶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 (p.33)

  - 글을 써봐야겠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는 중이다.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내게 써야 할 어떤 이야기가 있기는 있는 것인지, 생각하느라 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계속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물러 설 곳이 없을 때까지.... 


  “... 삶이 정말로 빨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삶은 더욱 분주해졌고, 삶에 대한 전체적인 파악과 방향 설정이 더욱 어려워졌을 뿐이다. 시간은 산만해진 까닭에 더 이상 질서를 세우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삶에는 뚜렷하고 결정적인 결절점이 생겨나지 못한다. 인생은 더 이상 단계, 완결, 문턱, 과도기 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달려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지만 늙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불시에 끝나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죽는 것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어려워진 것이다.“ (p.34)

  - 시간을 최대한 잘게 나누고 그 가장 작게 나뉘어진 시간, 그 시간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에 충실할 것을 목표로 이십대와 삼십대를 살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야말로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움직였을 뿐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들’이 바로 나였구나 여긴다. 


  “... 이야기는 시간에 향기를 불어넣는다. 반면 점-시간은 향기가 없는 시간이다. 시간은 지속성을 지닐 때, 서사적 긴장이나 심층적 긴장을 획득할 때, 깊이와 넓이를, 즉 공간을 확보할 때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 시간에서 모든 의미 구조와 심층 구조가 떨어져 나간다면, 시간이 원자화된다면, 평면화되고 희석되고 단축되어버린다면, 시간의 향기도 사라지고 만다. 시간을 붙드는, 붙들어 제어하는 닻이 온전히 떨어져 나가면, 시간은 안정성을 잃는다. 받침대에서 분리된 시간은 마구 내달리기 시작한다...” (p.45)

  - 파편화된 시간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하나하나 퍼즐 조각이 되고, 내 삶의 어느 순간 그것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삶이라는 큰 그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조금씩 그 믿음이 무너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흩어진 조각들이 모두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그 조각들 전부를 불러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잃어버린 조각들은 채워줄 다른 조각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반적인 탈시간화는 의미를 형성하던 시간적 매듭, 종결, 문턱, 이행 등의 소멸을 가져온다.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도 뚜렷한 시간의 분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까닭에 더욱더 강화된다...” (p.52)

  - 어쩌면 추억의 소멸이 곧 죽음일 것이다. 각인에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의미가 있음과 의미가 없음 사이엔 긴 교량이 있다. 나는 내내 그 교량의 어느 한 쪽으로 훌쩍 건너가지 못한 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배회하고 있다. 길 위의 삶이 아니라 다리 위의 삶... 


  “... 근대적 순례자의 후예는 산책자와 방랑자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에서는 산책의 유유함도, 떠도는 듯한 방랑자의 경쾌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조급함, 부산스러움, 불안, 신경과민, 막연한 두려움 등이 오늘의 삶을 규정한다. 사람들은 유유자적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에서 저 사건으로, 이 정보에서 저 정보로, 이 이미지에서 저 이미지로 황급히 이동한다...” (p.61)

  - 산책이라는 것이 한동안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이조차 기획 상품이 되어 버렸다. 신선하였던 최초의 올레길조차 이제 반드시 누리고 거쳐야 할 하나의 트렌드가 된 느낌이다. 우리들은 그저 이 올레길에서 저 올레길로 서둘러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마치 웹 서핑을 하듯...


  “웹 공간은 연속적인 시기와 전환기가 아니라 불연속적인 사건들과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어떤 전진도, 어떤 발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가 없다. 웹 시간은 불연속적이고 점적인 지금의 시간이다. 사람들은 한 링크에서 다른 링크로, 하나의 지금에서 다른 지금으로 옮겨 다닌다. 지금에는 지속이 없다. 지금의 자리에 오래 머물도록 붙들어두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수한 가능성과 대안들이 넘쳐나는 까닭에 한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강제나 필연성은 생겨나지 않는다.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저 지루해질 따름이다.” (p.72)

  - 항상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 방 안에 앉아서 세상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지만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지 않았다. 무수한 사람들과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소모하고 소모하고 소모하느라 내 자신이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 시간의 깊이는 모든 순간을 온 존재와, 그 향기로운 영원성과 결합한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서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p.100)

  - ‘좋은 시간’이라는 말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그렇게 머물고 있는 이 순간이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해소되지 않는 욕망에 무릎 꿇는 것을 나쁘게만 생각하는 뻔뻔함을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욕망을 이기겠다는 마음조차 하나의 욕망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쯤은 되었다.


  “사건이 없는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깊은 권태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닌 역사와 혁명의 시대,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지속성과 반복의 상태에서 이탈한 이 시대야말로 권태에 취약한 것이다. 아주 약간의 반복조차 이제는 단조로운 것으로 느껴진다...” (p.129)

  - 제아무리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인의 삶을 과거의 삶과 비교해본다면...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이라며 투덜대고 있었는데 이 또한 어줍잖았다. 내가 지금 단조롭다고 여기는 삶의 기저에는 그야말로 ‘약간의 반복조차 단조로운 것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현대 사회의 거칠 것 없는 가속화된 시간이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정신이 생겨난 것도 남아도는 시간, 한가로움, 느린 숨결 덕분이었으리라... 가쁜 숨을 헐떡이는 사람에게는 정신도 없다.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민주화가 만인의 노예화로 전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pp.181~182)

  - 현재의 ‘노동의 민주화’는 그저 ‘만인의 노예화’일 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가로움의 민주화’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물론 이러한 동의가 일종의 자기 합리화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색적 요소’를 되돌린 ‘사색적 삶’에의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중 

  - 책은 위와 같은 니체의 아포리즘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한병철 / 김태환 역 / 시간의 향기 (Duft der Zeit) / 문학과지성사 / 182쪽 / 2013 (2009)



  ps. 책 속에 언급되고 있는 ‘향인香印’이라는 중국의 시계가 흥미롭다. “향인은 원래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진 향시계 장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향으로 만들어진 도장은 화려한 장식의 통에 담겨있고, 바람을 막아주는 덮개에는 다시 글자나 다른 상징적 이미지의 구멍이 나 있다. 통에는 철학적인 혹은 시적인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시계 전체가 향기로운 단어와 그림으로 에워싸여 있는 것이다. 새겨져 있는 시의 충만한 의미가 벌써 향기를 발산한다... 향기가 나는 시간은 흐르거나 새어나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향냄새가 공간을 채운다. 향기는 시간을 공간화하고, 그리하여 시간에 지속성의 인상을 준다...” (pp.95~97) 그러니까 향을 피우고 그 향이 타들어가는 것을 하나의 시간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인데, 청각이나 시각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는 시간이 아니라 후각에 의해 깨닫게 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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