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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년이 온다》

인간의 시대로부터 지금 여기 돈의 시대로 온, 한 소년의 너무 늦지 않은

by 우주에부는바람

*2014년 5월 1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그로부터 34년이 흘러 2014년 5월 18일의 우리가 있다. 그 사이 군부 독재는 종식되었다 라며 들떴지만,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의 시절을 거쳤지만 이명박을 거쳐 지금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현재진행형이고, 우리는 인간의 시대가 아니라 돈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중이다. 그리고 한강은 꽤 늦게 80년 광주를 쓰고 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왔다.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수많은 광주에 또 하나의 광주를, 그것도 너무 느지막히 얹는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곳에 인간들이 있었다.


어린 새... 열여섯살 동호는 한 집에 살고 있는 친구 정대를 찾아 정처없이 헤매다 시체가 안치된 상무관에서 그리고 도청에서 은숙과 선주를 돕고 있다. 시체가 들어오거나 입관되어 나가면 이를 체크한다. “...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p.17) 의구심 속에서도 묵묵히 일을 하는 소년 동호는 이 소설의 중심에 있다. 에필로그에서 드러나는 동호와 ‘나’(그러니까 소설가이거나 소설 속에서 살아 남은 이들의 행적을 차분히 더듬어가는)의 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기원이 동호에게 닿아 있다.


검은 숨... 열여섯살의 정대는 동호가 애타게 찾고 있는 친구이다. 그러나 정대는 이미 죽었다. 동호와 함께 정미 누나를 찾기 위해 나갔던 도청 앞, 조준 사격을 하는 그들의 총구는 어린 정대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다른 시체들과 섞여 열십자로 쌓여 있는 정대는 혼으로 남았지만 자신의 육신 근처를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기름을 붓고 시체를 태워버리는 순간 정대는 자신의 친구의 혼의 기척을 느낀다.


일곱 개의 뺨... 동호가 일하던 상무관과 도청에서 시체를 닦아내던 은숙은 살아 남았다. 물론 ‘처음부터 살아남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 그녀는 살아남았고 지금은 출판사에서 일한다. 그녀는 사전 검열을 위하여 가제본된 책자를 들고 기관에 들어갔다가 그로부터 혹독한 따귀의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 일곱 차례 맞은 뺨을 하루에 하나씩 잊고자 한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95) 그녀가 발간하였던 책에 실린 문구, 그들의 검열에 의하여 삭제되었거나 살아남은 문장을 그녀는 더듬는다. 그리고 아예 대부분의 문장들이 삭제된 채로 넘겨진 희곡, 그 희곡으로 만든 연극을 그녀는 본다. 연극 속 배우들은 말을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입을 벌리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오직 그녀 은숙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쇠와 피...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있던 김진수는 동호와 은숙이 일하던 상무관과 도청을 오가며 일을 지휘한 인물이다. 도청의 진압이 끝나고 살아 남은 김진수와 나는 그들에게 붙잡힌 이후 한 조가 되어 생활했다. 그들은 부족한 양의 식사를 주면서 그것을 두 사람이 함께 먹도록 하였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도청에 남았던 그들은 그러나 한 톨의 밥을 사이에 두고 경쟁을 해야 했다. 김진수는 이후 자살하였다. 김진수는 동호와 같은 어린 학생들에게 항복하여 살아 남으라고 조언했다. 숨어 있다 손을 들고 일렬로 나오는 그들을 향하여 계엄군 장교는 사격을 가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134~135)


밤의 눈동자... 선주 또한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시체를 닦았다. 계엄군이 도청을 진압하던 그날 그녀는 여대생들과 함께 선무 방송을 하였다. 선주는 동호와 정대가 찾으려 나섰던 정대의 누이 정미를 기억한다. 노동 운동을 하던 선주가 구사대에 의하여 끌려가던 시절, 정미는 흩어진 신발을 찾아다주는 어린 누이였다. 그리고 이제 정미는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pp.173~174)


꽃 핀 쪽으로... 동호의 엄마는 마지막 날 동호의 작은 형과 함께 동호를 찾아갔었다. 그곳에서 동호는 여섯시가 되면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발걸음을 돌렸지만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다시금 도청을 찾아갔다.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은 지금 문 안으로 들어가면 돌아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동호의 작은 형은 들어가려고 했지만 동호의 엄마가 이를 말렸다. 동호의 작은 형까지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에필로그 : 눈 덮인 램프...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pp.212~213) 에필로그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한 일련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까지가 픽션인지 아니면 소설가의 개인의 실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상관이 없었다.


2014년 5월 18일... 지금으로부터 34년을 거슬러 올라 1980년 5월 18일의 그들이 있다. 그곳에는 치졸한 야만과 숭고한 용기가 함께 있었고 그것들 모두가 인간의 것이었다. 그곳으로부터 길어 올릴 수 있는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을까 하였으나 한강은 그러한 우려를 어느 정도 기우로 돌려 세웠다. 역사적 사실과 이야기 사이에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돈의 시대여서 더욱 의미심장해져버린 인간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조금 늦었지만 너무 늦지 않게 지금 여기로 왔다.



한강 / 소년이 온다 / 창비 / 215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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