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는 세대의 후예들이 찾아내는 (특촬물 속) 희미한 아버지의 흔적
꽤나 속도감 있는 시작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결혼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라니... 보통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라면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두 사람이 일사천리로 결혼에 골인하지만 쉽게 선언된 저 두 단어와는 달리 결혼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설정이거나 반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저 문장이 등장하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였던 우여곡절을 시시콜콜 보여주는 설정이거나...
물론 작가의 소설은 이 두 가지가 적절히 보태진 중간 즈음에 위치한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일단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암에 걸려 보험금을 신청하려고 보험회사에 직접 찾아온 채연과 보험회사의 심사팀 직원인 영호는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영호는 병원에 입원한 채연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어느 날 채연은 병원 옥상에서 영호를 향하여 말하는 것이다. 우리, 결혼해, 라고...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지만 결혼 후는 결혼 전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사실 채연은 이혼한 전남편과이 사이에 샘이라는 열세 살 아들이 한 명 있는데, 결혼 이후 미국에서 친가붙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샘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영호는 암세포를 줄이는 약물 치료와 이후의 수술을 앞둔 채 병원에 머물러야 하는 아내 그리고 자신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는 열세 살 중학교 1학년 아들을 결혼 이후 가족으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 특촬물에는 일종의 중간적인 부분이 있어. 다뤄지는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지... 대체 왜 그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특촬물의 이야기들은 다른 식으로 변화하거나 발전하지 않은 걸까? 간단한 이유지. 보는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특촬물에 만족하기 때문에. 단순명료한 이야기에 괴상한 균열이 있는 화면들. 그리고 그 균열을 외부의 산물들이 메워주는 거야. 애니메이션처럼 기술이 집적된 창작물도 아니고, 영화처럼 그저 매끄럽고 화려하지도 않아. 분명히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조금만 집중하면 전부 가짜라는 걸 알 수 있지. 특촬물을 좋아하는 건 바로 그 간극을 즐기는 거야...” (p.270)
사실 이것만으로도 꽤나 벅찬 구성인데 여기에 샘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변신왕 체인지킹이라는 특촬물이 중간에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특촬물의 진행에 따르자면) 진화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에 도움을 주는 커뮤니티의 맴버들인 블루와 민이 등장하면서 길고도 긴 특촬물에 대한 사변이 끼어든다. 그런가하면 이것과는 별개로 보험 조사티은 안과 그러한 안의 레이다에 걸린 윤필이라는 보험 사기 의혹자인 남자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점입가경으로 뻗어 나간다.
“우리는 아버지가 없어... 아버지 없는 세대의 마지막 생존자야.” (p.276)
“너는 그야말로 그렇게 살고 싶은 것뿐이다. 집에 틀어박혀 남을 골탕먹이며 조롱하고 싶은 것뿐이야. 나와 마찬가지다.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아무런 자각 없이 사는 게 좋은 거야. 네게 있어 유일한 자긍심은 네가 원하는 것을 네가 선택했다는 거겠지만, 그것도 웃기는 수작이다. 너는 사실 그 잘나빠진 취향 외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계의 구축이니 인력이니 하지만 사실은 아무런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는 곳에서 살고 싶은 거야. 이야기의 파편으로, 아버지가 없는 사람으로, 체인지킹의 후예로.” (pp.337~338)
소설은 사실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아버지가 되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할머니의 손에서 길러진 영호가 마약 중독자인 아버지의 손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샘의 아버지가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호를 돕는 조력자로 등장하는 민은 영호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없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고, 또 다른 인물인 안은 한 명의 자식을 죽음 이후 남은 자식에게나마 어떻게든 아버지로 존재하려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세대를 어떤 천형처럼 제 몸처럼 지녀야 했던 우리 아버지들 육칠십대 세대 그리고 그 아버지 세대를 극복해야 할 어떤 과제로 여기고 있는 사십대인 우리들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까지를 두루두루 다루고 있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포인트가 명확하게 모아지지는 않는다. 꽤 공을 들여 이야기를 꾸미고 있지만 그 흔적이 이래저래 남아서 오히려 작위적이라고 (철망에 대한 공포와 같은...)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특촬물에 대한 민의 길고 지루한 설명도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고 채연을 향한 영호의 애정 또한 개연성이 부족해 보인다. 이야기가 지닌 힘에 비하여 전체적으로 스토리의 리듬감과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인물들 사이의 긴장의 밀도가 약하다나 할까...
이영훈 / 체인지킹의 후예 / 문학동네 / 439쪽 / 2012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