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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투명인간》

서로를 향하여 등 맞대고 있는 역사와 인간의 고군분투 속에서 만수는...

by 우주에부는바람

《투명인간》은 부잣집 삼대독자인 김용식씨의 가계를 통해 살펴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한 미시적인 기록이자 동시에 하나의 가족 공동체가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떤 외형에 대한 성찰의 기록물인 소설이다. 역사의 현장에 있었지만 밀리고 밀릴 수밖에 없었던 혹은 있었지만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만 투명인간들의 이야기이면서, 모든 가족들을 위하여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헌신하였으나 결국 보이지 않는 몸뚱이로만 존재하게 된 한 투명인간의 이야기이다.


“여보, 나는 아침에는 낚시하고 오후에는 사냥을 하고 저녁에는 소를 몰아오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소. 하지만 나는 나일 뿐, 사냥꾼도 되지 않고 어부도 되지 않고 목동도, 사회에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것을 일삼는 사람도 되지 않을 거요. 내 아이들과 손자들, 그 아이들의 후손까지 모두 그렇게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소.” (p.21)


이야기는 낙동강 유역 상산군의 부잣집 자제였던 김용식씨가 독립운동을 하다 결국 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문희군 산골의 개운리라는 곳에 터를 잡으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소설은 일반적인 서사의 구조를 갖지는 않는다. 소설은 상산군에서 개운리로 그리고 서울로 공간을 이동하고, 식민지 시대에서 지금까지 시간을 따라 순차적으로 흘러가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화자를 바꿔가며 이를 진행시킨다.


소설의 중반 이후 등장하는 몇몇 인물을 제외한다면 이러한 화자는 바로 김용식 가계의 일원들이다. 유물론자이면서 학자풍인 김용식씨와 그의 아내, 그리고 제 아버지의 무능에 대하여 평생 한을 품고 살았던 김용식씨의 아들 충현과 충현의 아내를 뿌리로 하여 충현의 자식들인 백수, 금희, 명희, 만수, 석수, 옥희 다섯 자매와 석수의 아들이자 만수의 아들인 태석에 이르는 4대의 가족들 모두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만수씨이다. 둘째 아들이면서 첫째 아들인 백수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모습을 가졌던 만수는 그러나 백수가 월남전에 참전했다 죽은 이후 이 가족의 어쩔 수 없는 장남이 되어 가족을 이끌게 된다. 백수의 죽음 이후 실의에 빠진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온 이후에 만수는 자신의 부모와 자매들까지를 온전히 건사하면서, 자신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드는 운명의 험난한 파고들 속에서 한 시절을 꿋꿋하게 살아낸다.


“어떤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는지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우리처럼 한 가족이 전부 투명인간인 걸로 봐서는 유전적인 게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아, 따로 떨어져 사는 여동생이나 엄마는 투명인간이 아니다. 또 피 한방울 나누지 않은 집사람이 투명인간이 된 거 보면 일단 한가족끼리 모여 산다는 게 중요한 거 같다.” (p.361)


거시적으로 작동하는 역사, 그리고 이와 무관한 듯 그렇지 않은 듯 세세하게 엮이고 마는 인간들로 이뤄진 한 가족을 끈질기게 연결시키면서 우리 굴곡진 현대사의 이모저모를 살피려는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건재한 작가의 말발에 휘둘리는 것도 그리 싫지는 않았고, 캐릭터를 구축에 출중한 작가가 또 한 번 새롭게 창조해낸 만수라는 인물에게 답답함 속에서도 끌려가게 되는 것 또한 싫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만수라는 전형적이지 않은 하나의 캐릭터만으로 해결하기에는 다루고 있는 갈등들이 너무 많다. 또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스치듯 지나가는 이들 가족 모두의 사상이나 가치관을 수렴시키기에 만수라는 캐릭터는 (눈길을 끌기는 하지만) 부족해 보인다. 그러니 작가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만수라는 (한 가족이면서 반대의 성향이었던 만수의 동생 석수 또한 투명인간이 되었다는 설정까지도) 설정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나버린 이야기들을 수습하기 위한 작위적인 방편인 듯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성석제 / 투명인간 / 창비 / 370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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