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에 붙박힌, 그래서 언제든 어디에서든 모호하게 존재하는...
이승우의 소설이 또 조금 변모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러한 것인지 그저 나만의 느낌인 것인지 헷갈린다). 2010년에서 2013년 사이 여러 지면에 발표한 단편 소설들을 살펴보았더니 그렇다. 내용보다는 형식의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 자세한 탐구는 마침 이승우 창작 방법의 비의를 풀어가는 것을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고 있는 후배에게 숙제로 남겨 놓아야 할 것 같다. 지금 현재로서 나는 아주 먼 과거의 이승우와 과거의 이승우와 현재의 이승우와 가까운 미래의 이승우 중 어떤 이승우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리모컨이 필요해」.
“... 왜인지 모르지만, 무엇인가를 향해, 그것이 무엇이든, 온몸을 내던지듯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나는 불편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과감하고 거침없는 움직임을 거북해하는 것 같다. 그들이 곧 과감하고 거침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들이밀고 대들 것 같아 무섭다고 해야 할까...” (pp.33~34) 선배의 부탁으로 강의를 하기 위하여 내려간 소도시의 허름한 여관방, 그 방의 텔레비전은 새벽이면 켜지지만 그것을 누워서 끌 수 있는 리모컨이 없다. 나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삶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어떤 기제의 부제로 내내 곤혹스러워야 하는 우리들의 불안한 일상을 향한 소소한 은유라고 볼 수 있겠다.
「신중한 사람」.
“... 신중한 자는 저지르거나 부수거나 걷어차지 못한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pp.46~47) 스스로를 신중하다고 생각한 오십대 가장인 남자의 이야기이다. 서울을 떠난 시골의 생활을 꿈꾸었던 남자의 세계가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상황이 그러한 상황을 둘러싸고 있는 이런저런 내막이 참 애달프다.
「오래된 편지」.
은사인 J선생의 갑작스러운 부고 후 윤은 그의 작업실에 남겨진 원고들을 정리하는 책무를 떠맡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J선생과 의문의 여인이 함께 찍힌 사진 한 장,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자신이 선생에게 보냈던 일종의 고발장과 그 고발장에 첨삭된 선생의 ‘욕심내고 있다는 건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순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 자신의 마음 속까지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위선과 위악의 모호한 경계는 어쩌면, 평범한 지식인들이 평생 기우뚱거리며 걸어야 하는 추레하고 얇디 얇은 어떤 줄 같은 것은 아닐까...
「이미, 어디」.
“... 시간은 나아갈 것이고 이미는 남겨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므로 이미는 시간의 뒤에 머물 것이다. 그는 중앙도서관에서 이미를 지나간 시간이 어디로 가는지 읽었다. 이미를 지나간 시간은 어디에서 살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이미는 시간의 뒤에서 살고 어디는 새로운 현재를 살 것이다...” (pp.131~132) 음...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 중 가장 난해하다. 서로 다른 축으로 아주 잠깐 겹치게 될 뿐인 두 개의 축을 작가는 하나의 축으로 수렴시켜버린다. 시간을 지나 공간으로, 그래서 그것들은 순환할 수도 회귀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딥 오리진」.
소설가인 그는 까페에서 만난 묘령의 여자로부터 유명 작가인 T의 소설인 『한밤의 펭귄』을 자신이 대필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러한 의혹에 댓글을 달게 된다. 그는 과거에 T와 우연히 마주친 경험이 있는데 물론 기분 좋은 마주침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상황은 유명 작가인 T를 질시한 유명하지 않은 작가인 그의 음해라는 결말로 치닫게 된다. 대필 의혹을 제기한 원래글의 작성자가 바로 그가 아닌지 의심을 받게 된다. 그의 누명을 벗겨줄 여자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까페 ‘딥 오리진’ 이다. (소설을 읽고 우연히 딥 오리진을 검색해봤더니 올림픽 공원에 근처에 있는 까페이다. 이승우 선생의 집이 바로 그 근처 아파트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PPL인 셈인가...)
「칼」.
“내 고객들은 모두 심약한 사람들이야. 누구보다 약하고 억눌린 게 많고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이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해 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칼을 모을 만큼 강한 것이 아니라 칼을 수집해야 할 정도로 약한 거지...” (p.218) ‘일몰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일출 시간이 되면 퇴근’하는 나의 아르바이트는 한 노인을 지근거리에서 보호하거나 감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을 의뢰한 사람은 바로 그 노인의 피붙이이자 내가 일하는 곳으로부터 칼을 구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강해 보이는 것의 약한 구석 그 후미진 어두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아도 좋겠다.
「어디에도 없는」.
여관이나 모텔 등의 숙박업소가 많은 소설에 등장한다. 어쩌면 그것은 이승우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고로 등장인물들은 불안하고 별다른 사건이 없더라도 쫓기는 인상이 짙다. 집이라는 둥지를 떠나 어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은 그래서 결국 ‘어디에도 없는’ 존재처럼 비춰진다.
「하지 않은 일」.
“하지 않은 일은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증명할 수도 없다. 한 사람은 주장할 수 있고, 주장하는 자는 증명의 의무를 가진다. 하지 않은 자는 주장하지 않고 주장할 수 없으므로 증명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지 않은 일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그것도 상세한 설명을 통해 조목조목 답하라는 요구는 교묘한 추궁의 기술이고 일종의 모욕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pp.274~275) 그야말로 소설의 제목처럼 ‘하지 않은 일’이 바로 소설의 소재이므로 소설에는 바로 그 ‘일’이 무엇인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은 그저 그가 ‘하지 않은 일’이 어떻게 해서 ‘하지 않은 일’이 아닌 그 ‘일’이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그 ‘하지 않은 일’이 마치 이미 한 ‘일’처럼 되어 있는 상황 앞에서 속수무책인지를 보여주는데 온전히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승우 / 신중한 사람 / 문학과지성사 / 335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