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 사이의 애잔하지만 애석하지는 않을 상실의 신경전...
*2014년 8월 1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이상하게도 엄마와 이런저런 일로 신경전을 벌인 다음이면 꼭 이처럼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가 실린 소설을 읽게 되고는 한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뜨거운 마음의 열대야에 덧옷을 하나 더 껴입는 형국인 셈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일종의 이열치열 요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성가신 마음의 상태로부터 일거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 상태에 거주함으로써,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는 그런...
“... 사람의 죽음은 신체의 기능 정지라는 자연의 현실과 사회적 인격의 소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련의 사건이다. 죽은 사람에겐 정지한 몸의 현실에 맞춰 정신을 조정할 힘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그걸 해줘야 한다... 누군가 죽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p.17)
소설은 (애초에 심장이 좋지 않기는 하였으나) 엄마의 돌연한 죽음, 그 죽음 이후 49일째날(그러니까 49재가 있는)로부터 시작된다. 소희, 석희, 은희라는 세 딸 중 둘째 딸을 나레이터로 하여 49일, 50일, 51일 하는 식의 소제목을 달고 진행된다. 이 시간들은 이미 죽은 엄마가 본격적으로 소멸되어야 하는 죽음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남겨진 가족들이 그 죽음을 껴안고 버텨내야 하는 삶의 시간이기도 하다.
“... 아버지가 말하는 엄마는 오로지 아버지의 행복과 건강과 안위만을 위해 살았던 수호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와 살았던 과거는 나날이 더 빛나게 되었다. 가공의 영역에서 이상화된 상실한 과거는 현실의 좌절을 보상하거나 치유해주는 일 없이, 고통과 슬픔만을 더욱 깊고 어둡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엄마 애길하는 아버지는 고독해 보였다...” (pp.296~297)
아직 공부를 하는 과정에 있는 막내딸 은희와 호주로 결혼과 동시에 이민을 가게 된 첫째딸 소희를 대신하여 남겨진 아버지를 챙기는 것은 어영부영 둘째딸 석희의 몫이 되고 있다. 미혼이고 소설가라는 자유로운 직업을 가지고 있는 탓에 떠밀리듯 아버지, 그리고 더불어 죽은 엄마의 그림자까지 떠맡게 된 석희의 복잡한 심사 또한 소설의 이해를 위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이다. 엄마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돈에 연연해하거나 눈물 보이지 않으며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향한 석희의 감정은 알 듯 모를 듯 하다.
“... 평범한 사람이 체험하는 역사란 이런 게 아닐까. 모순과 불합리의 회오리. 선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결정할 수 없는 거창한 것들에 둘러싸여 어떻게든 살아남는, 살아가는 일.” (p.230)
그런가하면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던 아버지가 치러낸 인생,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를 남편으로 선택함으로써 만들어진 엄마의 인생과 그러한 인생에 간혹 끼어드는 역사적 사족들은 완벽하게 사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역사가 우리들 평범한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 평범한 사람의 삶들이 모여 역사가 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의 그날까지도, 어쩌면 죽고 나서도 아버지는 생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것이다. 시작도 끝도 아닌 한중간. 그렇게 닥쳐올 미래의 순간들은 이미 지나버린 과거로만 이루어지게 될 터였다. 아버지의 찰나생(刹那生)은 찰나멸(刹那滅 )로만 이루어졌다... 찰나생 찰나멸. 그러니 할 수 없나? 고작해야 찰나뿐이니, 힘껏 살아가는 수밖에.” (p.311)
소설의 내용도 그렇지만 소설 전체의 구성도 꽤 마음에 든다. 탈상을 앞둔 99일, 이라는 소제목을 가진 챕터의 마지막 문장 뒤에는 (끝)이라는 표식이 달려 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고 나면 278일, 이라는 소제목이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그 다음 장인 304일이라는 소제목을 가진 챕터의 마지막 문장 두에는 (계속)이라는 표식이 달려 있다. 그러니까 엄마의 죽음을 온전히 끝낸 뒤에도 남은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소설은 온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엊그제 전화 통화에서 엄마는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 뒤에 남겨질 엄마를 걱정하고 있더라고 넌지시 말씀하셨다. 아마도 너희들이 내게 함부로 대할까 아버지가 걱정하시니 알아서 잘 처신하라, 라는 의미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게 어린 시절 우리가 저절로 찾던 엄마는 이제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질까 전전긍긍하는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소설을 모두 읽고 난 지금 이 문장이 자꾸 혀에서 되새김질 되고 있다.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아서 키우느라고 엄마인 엄마가 되었다.’
최지월 / 상실의 시간들 / 한겨레출판 / 321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