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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낙오한 삶들의 후미진 곳을 향하여 들이미는 신산스러운 시선...

by 우주에부는바람

작가는 인상 깊은 이야기들을 선택하는 대신 우리들 주변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소설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 이야기들의 시야는 우리들 주변의 삶들 중 특히 후미진 곳의 신산스러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작가의 어떤 노림수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는 하지만) 짜증이 솟구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의 구성에 특기를 가진 작가가 이 리얼한 이야기에 (이야기 자체만으로 충분히 리얼하니...) 예전의 《고래》와 같은 환상성을 가미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봄, 사자(死者)의 서(書)」

“... 마이크를 든 젊은 여기자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간밤에 동사한 오십대 남자는 삼년 전 실직한 이후 가족과 떨어져 혼자 고시원에서 생활해오던 중 술에 취해 공원에서 잠이 들었다 급격한 기온 하락으로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면접시험 보듯 또박또박 전한다. 사내는 화면에 나오는 산책로 옆 벤치에 시선을 멈춘다. 벤치 아래엔 일회용 라이터가 하나 떨어져 있다.” (p.29) 겨울을 뚫고 봄을 향하는 듯한 계절, 그러나 이러한 계절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홀로 세상과 동떨어져 있던 한 사내는 어쩌면 죽은 후에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계절 봄이어서 더욱 무참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평온 무사한 모양에 수렴되지 못한 채 홀로 구천을 떠돌아야 할 어떤 사내의 혼백에 대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동백꽃」

어느 한가한 섬마을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꽁트 같은 이야기이다. 섬마을 최고 부자의 아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경숙과 유자의 한 판 겨루기는 결국 모두가 패자인 이야기로 끝이 나고 마는데... 사교병이라고 불리우는 성병, 어쩌면 그 병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구회장 부자와 그를 둘러싼 마을 아녀자들의 대를 이은 암투기라고 볼 수 있겠다.


「왕들의 무덤」

글을 써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작가라는 타이틀을 지닌 채 우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여인 정희는 어느 날 출판사 모임에서 만난 현수와 함께 취재차 왕릉으로의 짧은 여행길에 오른다. 유학을 간 딸과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남편, 그렇게 엄연한 일상의 여인인 그는 여행길에서 오래전 캐디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자신을 희롱하였던 한 중년의 사내와 그 사내의 삶의 방식을 떠올린다. 그 어두움으로부터 탈출하고자 끊임없이 만들어왔던 자신의 이미지는 어쩌면 이제 그녀 스스로는 벗어버릴 수 없는 가면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파충류의 밤」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으로 뽑인 작품이다. 실린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지금 지구는 포유류의 시대지만 오래전 파충류는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이 땅의 지배자였지요. 수경 씨 머릿속에서 들리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아마도 그 파충류가 울부짖는 소리였을 겁니다... 우리 뇌가 세 개의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건 알고 있죠? 인간의 뇌라고 불리는 대뇌피질과 포유류의 뇌인 변연계, 그리고 파충류의 뇌라고 하는 뇌간이 바로 그것인데, 뇌간은 기억이나 학습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이나 감정을 다스리는 변연계와 달리 저 밑바닥에서 조용히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죠. 까마득한 옛날 파충류의 본능을 간직한 채 말입니다...” (pp.92~93) 세상을 온통 떠돌아 보았고 하릴 없이 자위에 몰두해 보기도 했지만 수경은 아직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시 원고를 정리해야 하는 수경의 이야기이자, 수경의 끊어지지 않는 시간을 툭 분지르며 들어온 한 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칠년 전 이혼을 한 경구는 일용 노동자이다. 제 어미를 때린다고 경찰에 신고 한 딸 미숙과 영민과 함께 살고 있으며, 아내와는 진작에 이혼을 했다. 그런 경구도 한 때는 트럭을 몰며 잘 나간 적이 있지만 화투판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몇 개월만에 날려 버렸다. 그런 그가 하루치 노동을 마치고 나오면서 받아 놓은 언 칠면조 고기는 어느 새 살인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는 이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제 삶의 한 가운데로 훔친 트럭을 몰아간다.


「전원교향곡」

아내 그리고 아이와 함께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짓던 정환에게는 이제 남은 것이 없다. 농사는 망했고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시골을 떠났다. 정환은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저 한 달에 한 번 딸아이인 은우를 만나는 기쁨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은우와 함께 한 바로 그 날, 겨우겨우 참아내던 술을 급기야 마시고 쓰러져 자게 된 그 날, 은우는 옆집 돼지 축사 옆에 묶여 있던 세퍼드에게 다가갔다가 공격을 당하게 되는데... 전원교향곡 속의 전원은 없고 실패한 사내의 속절없는 낭패감만이 가득한 소설의 아이러니...


「핑크」

영화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작가이기에 설계가 가능한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왠지 코엔 형제 식 아이러니와 유머가 깃든 듯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핑크 색으로 코디를 한 뚱뚱한 여자와 그 여자에 의해 호출된 대리 운전 기사, 갑작스레 튀어나온 고양이와 트렁크의 시체까지...


「우이동의 봄」

실패한 아버지와 떠나간 엄마 대신 이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단칸방에 얹혀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이다. 막노동을 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정확히 알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내게 주인집 딸 경숙이 일거리를 소개해주지만 그마저도 면접에서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어느 낙오된 인생들의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소설은 어쩐지 그렇게 주인공들만큼이나 빈곤한 듯하지만, 마지막 우이동 계곡에서의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는 인상적이다.



천명관 /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 창비 / 221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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