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기호 《차남들의 세계사》

현대사 속 눈먼 차남들의 웃픈 대표 주자인 나복만의 끝나지 않는 일대기.

by 우주에부는바람

“1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육군 소장에 불과했던 전두환 장군이 갑작스럽게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까닭은, 그가 자신도 원치 않았던 누아르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사를 하다가 대통령에 취임한, 세계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사관이었다. 당시 그가 보안사령관 신분으로 수사를 맡았던 사건은 바로 또 다른 독재자인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이었다... 그는 최대한 피해자의 심정으로, 열과 성을 다해 수사에 임했다. 하도 열과 성을 다해 수사하느라 피격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자신의 직속상관들까지도 모조리 체포하고 구금했던 전두환 장군은, 그래도 성이 다 차지 않았던지 그냥 자신이 피해자의 신분을 대신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누아르의 핵심 서사란 무엇인가? 예상치 못한 사건에 우연히 휘말린 한 사람이, 그로 인해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마저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누아르의 기본 뼈대 아니던가? 전두환 장군은 독재자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가 독재자가 되어버렸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며칠 전,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전두환 장군은 당시의 심저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회피하지 않겠다.” 누아르의 주인공들은 총을 뽑기 전 항상 이런 유의 대사를 나직하게 내뱉는다.)...” (pp.12~13)


1980년 8월 27일,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거수기 역할을 하는 대의원 2525명이 모인 가운데, 이들 중 2524명의 찬성표로 (찬성하지 않은 1명도 반대가 아니라 기권이었다. 어쩌면 이 한 명을 가지고도 작가 이기호는 소설 한 권쯤 거뜬히 쓸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길게 인용한 윗 부분을 보라, 이기호의 너스레는 정말이지 성석제 이후 최강이다.) 대통령이 되었다. 사실 그리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다.


소설은 바로 이 어둡고 침침한 현대사를 향한 일갈이다. 하지만 그 일갈의 방식이 예상외다. 작가의 말마따나 한 편의 누아르와도 같았던 전두환의 정권 찬탈 시기에, 그 현대사의 질곡에 어영부영 당하고 만 한 인물을 그리고 있는 소설은 그야 말로 웃기고도 슬프다. (웃프다는 신조어가 이 소설만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그렇게 작가는 삼십여 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건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고 이 년여가 흘러 발생한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맞닿아 있다. (소설 속에서도 잠시 언급되지만 명분 없는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의 정권 찬탈을 모른 체 해준 형님 국가인 미국을 향하여 넙죽 엎드린 전두환과 그런 전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던 이들은 이 독재의 유지에 기여하는 미국으로 항쟁의 화살을 곧장 돌렸다. 그리고 그 최초의 결과물이 바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련자들은 모두 체포 되었고, 주범 격인 문부식과 김은숙 또한 원주 가톨릭 문화관에서 자수를 하게 되는데, 바로 이즈음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나복만’이 등장한다.


“...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전문 용어로 ‘눈먼 상태’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p.179)


아마도 그 시기를 겪어야 했던 우리 모든 ‘차남들’ (어쩌면 형님 국가인 미국을 제외한다면 우리들 모두 심지어 형님을 등에 엎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까지도 실제로는 모두가 ‘차남’이었던 것은 아닐까...) 의 대표라고 보아도 무방한 나복만은 어느 날 우연히 교통사고 아닌 교통사고를 내고 난 다음 제발로 경찰서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과에 들렀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직 사건의 끄트머리에 이름을 올리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기부 요원과 동행하게 된다.


소설은 그렇게 우리들 눈먼 차남들을 대표하는 나복만이, 선량하고 순진무구하다 못해 짜증을 불러일으킬 정도인 나복만이 어떻게 30분 동안의 경찰서 방문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배자가 된 채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나복만의 애인인 김순희, 동료인 박병철, 원주 경찰서의 곽용필 경정과 최형사, 곽 경정의 아내인 김경아와 그런 기경아와 불륜 관계였던 김상훈, 그리고 나복만을 옭아매는 안기부 요원인 정남운 과장이 나복만의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물론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적절한 실제 사건과 지학순 주교, 최기식 신부, 문부식 (어제인가 우연히 까페 여름에서 문부식 선생에게 요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처자를 만났는데... 뭐 사는 것이 이러니 소설쯤이야...) 등 실명의 인물들을 통해 힘을 부여받고 있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삼십여 년 전의 나복만 이후 끝이 난 것일까?


그야말로 웃픈 소설을 읽고 며칠이 지난 어제, 국정원 댓글 사건의 주범인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그러니까 소설 속 안기부가 이름만 바꾼, 그러니까 소설 속 정 과장 등의 대표라고할 수 있는) ‘정치에는 개입하였으나 선거에는 개입할 의도가 없었다는’ 해괴한 논리로 선거법 위반에 대한 무죄 선고가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국정원장과 국정원 직원들이 개입하고자 하였던 (그러나 그 개입의 의도를 ‘눈먼 차남’인 판사는 알아챌 수 없었던)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은 바로 이 대한민국 누아르의 표면적인 주인공인 전두환이 그 죽음을 초헌법적으로 수사하고자 하였던 바로 그 독재자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차남들의 세계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소설 속 나복만 또한 아직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대학로 어딘가에서, 자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써 그리던 몽타주 실력을 기반으로 하여, 그림을 그리며 여태 숨어 지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눈감은 자들에 의하여 눈먼 자가 될 것을 강요당하며, 억울한 내색이나 가끔 뱉어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간혹 이처럼 재미있고 슬프면서도 메시지 가득한 소설을 읽으면서...



이기호 / 차남들의 세계사 / 민음사 / 310쪽 / 2014 (201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박민정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