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그러나 생소한, 어떤 가족 관계들의 끈끈하지만 덜 여문...
익숙한 그러나 생소한... 그러니까 어딘가에서 읽거나 들었을 법한 우리 일상의 이야기들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내가 겪지는 않기에 생소한 어떤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어떤 식으로든 혈연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하나의 이야기 안에 포진시키는데, 그 관계라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 소재에서 일종의 패턴을 가지고 있는 듯하고 그것을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아직은 덜 여문 느낌이랄까...
「실내극 이후」
어린 시절 Y에게 일어났던 납치 사건... 한 편의 실내극과도 같았던 사건, 납치범은 잡히면서 유괴한 Y를 죽였다고 했지만 살아있던 Y는 그렇게 죽은 아이가 된 채로 시골 노파에 의해 잠시 거두어졌다가 자신의 책상에 흰 국화가 있는 교실로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오게 된 사건이 피해자였던 Y는 이후 계속해서 상담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성장한 Y의 앞에 자신을 납치했던 여자가 횡단보도 저편으로 다시금 나타난다. 관객과 배우들 사이의 좁은 간격을 특징으로 하는 실내극처럼, 어느 순간 우리 또한 일종의 트라우마로 가득하게 될 사건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일 수도 있는, 무수한 사건 사고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이렇게 그려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고해 마지막 의식」
소실부락의 신부였던 K는 마을 사람들의 비밀을 들어주는 역할을 하다 어느 날 그 비밀을 적고 있는 것을 들키면서 오히려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고 동시에 또다른 비밀의 주인공으로 왜곡되면서 그 마을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그 비밀의 또 다른 당사자이기도 한 소녀 J와 함께 살게 되는데... “... 죄와 죄를 둘러싼 이야기가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K는 생각했다. 살아가려면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몰랐다. 반드시 죄라고 명명되는 무엇인가가 존재해야만 하는지도 몰랐다. 반드시 죄라고 명명되는 무엇인가가 존재해야만 세상이 유지된다는 것을. 그걸 몰랐던 자신은 결국 사각지대에 있는 존재였다...” (p.60) 죄 혹은 비밀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우리들의 어둡고 사적인 속내, 적나라하게 밝힐 수 없는 그것들만의 어떤 공간은 견고하면서 동시에 언제고 파괴될 수 있을만치 연약하다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불편한 몸으로 병신 소리를 듣던 나와 그런 나를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것 같았던 형... 그러나 그러한 형의 부탁, 그러니까 자신이 임신시킨 여자의 아이가 없어지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녀의 반지하방으로 들어간 나... 내가 사랑하였고 임신시키고자 하였던 여인은 스스로 아이를 뗐고, 이제 나는 형의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한 여인의 아이가 사라지도록 하였지만, 결국 그 아이의 아이는 나의 아이였다는, 그런...
「생시몽 백작의 사생활」
엄마가 권하는 촌스러운 원피스를 대학 내내 입었던 J와 그런 J와 잠시 연애 비슷한 것을 하였던 교수 K, 그리고 K가 건넸던 동료교수 H의 책 『생시몽 백작과 그 주의자들』... 그리고 지금 J는 유령 회사에서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생활 폭로 운운하며 돈을 뜯어내는 일을 하고 있고, 그 명단에 K를 끼워 넣었다...
「옛날 옛적 미국에서」
엄마의 손에 이끌려 트리니티 국제학교에 입학하게 된 제나...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 국제학교의 허상이 밝혀지게 되지만 제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부모를 성적인 폭력의 당사자로 지목하게까지 되는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뒤틀린 관계에 천착하는 작가이다.
「기념일들」
O에게는 여러 기념일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남편이 사라진 날인 20101015, 이 날 또한 여러 기념일들 중 하나로 포함될 수 있을까... “이제 그가 실종된 날, 은 다른 방식으로 진술될 것이었다.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뿐이었다. 어떤 날은 굳이 기념할 까닭이 없었다...”
「장물의 내력」
준혁 형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에서 나는 만년필을 하나 훔치게 된다. 그리고 사장은 내게 나랏돈을 타내기 위한 교육을 받을 것을 권하고, 나는 그것에 따르지만 결국 그렇게 들어온 돈을 사장은 자신에게 보내라고 요구한다. 무언가 이 돌고 도는 암울함이라니... 여기에 나를 배척한 여자 친구는 알고 본 준혁 형과 함께 살고 있고, 나는 그러나 훔친 만년필 사건을 헤어진 여친인 지영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준혁 형에게 부탁하는 신세....
「굿바이 플리즈 리턴」
유진과 동생인 희진... 어느 어린 시절 온 식구가 외출을 했지만 그 길에 다시 돌아온 것은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 뿐이다. 그 이후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아버지, 그리고 애초에 자폐 증상이 있던 희진을 건사하는 것은 유진의 몫이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사회 생활을 시작한 유진에게 대학 교육의 기회까지를 제공하였던 윤 교수... 제대로 끊어지지 않은 과거와의 연결고리는 무수한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혹은 현재의 가지들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박민정 /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 민음사 / 249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