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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우리 혹은 우리 사회를 향한 어느 인문학자의 쓰잘데없고도 고귀한 시선..

by 우주에부는바람

모두 일곱 권으로 출간될 도정일 문학선 중 두 권의 산문집이 먼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그중 첫 번째 권이다. 황현산 선생의 산문을 읽었을 때도 아주 좋았는데 도정일 선생의 글 또한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유머가 곳곳에 배어 있고,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정곡을 찌르고 있어서 읽기에 좋다. 그저 발길 가는대로 허투루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선 자리자리마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바라볼 줄 아는 것이 곧 힘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냉혹하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미움을 사지 않을 방법은 인간의 체온을 가진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이다. 그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선택해야 할 방향은 자본, 주주, 투자자 들의 최대 이익만을 챙기는 일이 아니라 최소한 여섯 가지 가치들을 함께 고려하는 쪽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고객, 노동자, 투자자, 하청업체와 대리점, 사회 공동체, 환경이 그 여섯 가지 가치다...” <신년 작심> (한겨레 2006.1.6.) 중

산문집은 모두 네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 (1부 ‘선물의 도착’, 2부 ‘쓸쓸함이여, 스승이여’, 3부 ‘관계의 건축학’, 4부 ‘사회는 언제 실패하는가’), 90년대와 2000년대를 아우르며 저자가 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실은 칼럼으로 (기사에 따르면 이렇게 두 권으로 엮은 책에 실은 것은 저자가 지금까지 쓴 칼럼의 10분의 1 정도라고 한다) 이루어져 있다. 챕터가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환기시키기 위한 어떤 내용이거나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우리의 어떤 시선에 대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 수용자들로 하여금 에너지의 최소 투자로 최대의 즐거움을 얻게 해주려는 것은 대중문화의 일반적 생산 원리다. 쾌락의 경제학에 입각한 이 원리는 ‘쉽게, 재미있게’를 생산의대원칙으로 삼는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문화론적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대중문화적 효용의 남용, 다시 말해 문화의 전면적 오락화 경향이다... 문화는 소비 영역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비 이상의 창조적 생산활동의 영역이기도 하다. 창조적 생산은 생산자와 수용자 모두의 땀을 요구한다. 창조적 생산치고 손쉬운 것은 없고 창조적 수용의 경우에도 최대의 에너지 투자가 요구된다. 좋은 예술작품이란 쉽게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기보다는 수용자에게 거의 언제나 최대의 에너지 투자를 요구하는 작품이고, 투자한 만큼의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다. 어려운 책이 반드시 고전인 것은 아니지만 고전치고 어렵지 않은 것은 없다. 모두 쉬운 길로만 뛰려는 문화, 쉽지 않은 것은 철저히 기피되는 문화, 쾌락의 경제학을 생산과 수용의 전면적 논리로 삼는 문화는 섬유질 없는 이유식의 문화다. 이런 문화 속의 사회는 장담컨대 정신적 ‘유아기’를 벗어나기 어렵다.” (pp.64~65) <쾌락의 경제학과 바보 노선> (한겨레 1995.1.21.) 중

“문학 독자한테서는 비독자와는 다른 어떤 행동상의 특징이 발견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의 사회적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미국 예술기금위원회 NEA가 2002년에 연방 통계청을 통해 실시한 ‘미국인의 예술 참여도’ 조사를 보면 그 질문과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발견은 문학 독자가 비독자들에 비해 자선활동이나 자원활동 같은 사회적 참여행위의 빈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문학 독자들이 사회적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3%임에 비해 비독자의 참여율은 17%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참여란 연결의 다른 이름이다. 문학 외의 예술 형식, 음악회에 가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인접 예술 영역에 대한 참여율도 문학 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는 것도 그 조사에서 드러난 발견의 하나다.” (p.83) <시 배달부의 인기> (한겨레 2006.7.14.)

영문학자이며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는 저자는 문학 혹은 문화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유 또한 명확해 보인다. 우리가 문화 혹은 문화를 향유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개개인의 그러한 행위 자체가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약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러한 문화 향유자로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지적하는 것도 멈추지 않는다.

“넓게 규정했을 때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사유, 표현, 실천의 총합이다. 이 의미의 인문학은 강단 인문학 혹은 학문으로서의 인문학과는 좀 구별될 필요가 있다. 학문 갈래로서의 인문학은 서구 근대의 산물인 반면, 인간에 관한 사유, 표현, 실천으로서의 인문학은 동서양에 걸쳐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가 보통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학, 철학, 역사, 예술사, 서지학 같은 근대 이후의 학문 분과들을 지칭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생산하고 인간의 길을 모색해온 동서고금의 오랜 사유 전통을 통틀어 의미할 때가 더 많다. 이런 인문학은 좁은 분야를 파고드는 전문적 학문 연구자만의 것이 아니고 그런 전공자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의미의 인문학은 만인의 것이다. 강단 인문학의 경우처럼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과 인문문화적 가치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서의 인문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p.179) <인문학적 사유의 네 가지 책임> (국민일보 2010.12.17.)

이러한 문화에 대한 저자의 관심의 중심에는 인간과 사회가 있으니 그것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한 인간과 사회를 함께 고려하는 저자는 단순한 강단 인문학이 아니라 (강단 인문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실천적인 차원에서의 인문학으로서 인문학을 규정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인문학적인 토양 속에서 우리와 우리 사회에 관심을 두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 왕조 사회의 신민臣民이었다가 식민지 시대를 거쳐 졸지에 뭐가 뭔지도 모르고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바뀐 것이 근대 한국인의 정치적 운명이었다면, 이 운명의 전개에서 거의 송두리째 빠진 것이 ‘시민으로의 성숙’이라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빠진 부분을 메우고 시민적 역량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정권의 의무이며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p.73) <절반의 선물> (2002.3.4.) 중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 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당해 있다. 더 날씬한 은유가 생각나지 않아 좀 투박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하나는 ‘선망의 코드’다. 탐욕의 코드는 폴 새뮤얼슨이 말한 자본주의적 ‘행복 방정식’을 따른다. 이 경제학자가 소개한 계산법에 의하면 행복(H)은 욕망(D) 분의 소비(C)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소비했는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한다. 소비를 소유로 바꿔놓으면 이해하기가 쉽다. 내가 100을 원하는데 100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다. 그러나 100을 원하는데 가진 것은 20뿐이라면 내 행복은 완전치의 1/5에 불과하다. 이 경우 나는 겨우 20%만 행복하고 80%는 불행하다... 선망의 코드는 “저 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 되지, 암 안 될 일이고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부호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 내가 저 인간만큼 갖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하다...』 <행복 방정식> (한겨레 2006.7.28.) 중

특히 우리 사회에서의 행복에 대한 가치를 논하는 부분에서 크게 공감이 간다. 행복은 욕망 분의 소비라는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의 방정식은 바로 지금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하나의 지표로 타당해 보인다. ‘탐욕’과 ‘선망’이라는 두 가지의 코드로 읽히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슬프기까지 하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에 대한 관심이 우리 정치 지형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 가진 자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나쁜 정부와 무능하고 무감각한 지도자를 두었을 때에도 사회는 실패한다. 사회가 정부보다 못할 때에도 그 사회는 실패한다. 그러므로 사회는 언제나 정부보다 나아야 한다.” (p.336) <허리케인이 올지 누가 알았나> (한겨레 2005.9.9.) 중

“정치를 말하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민주주의는 독재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자동’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겨우 몇 번의 ‘문민정부’ 실현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민주주의 비슷한 것을 실현한 지는 이제 겨우 15년에 불과하다. 80년대의 민주화 항쟁 시대를 다 넣어 계산해도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사반세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짧은 연륜의 민주주의를 가진 나라 사람들이 이제 민주주의는 되었으니 그 문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순진이 아니라 자만이며, 이런 가당찮은 자만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의 하나다.” (p.339) <한국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한겨레 2007.3.2.)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저자의 이러한 애정 어린 시선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그 믿음은 선택적이다. 그는 우리가 깨어 있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그러한 우리의 개화된 정신만이 우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전적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화된 정신은 졸속으로 자본주의화된 우리 사회가 쓰잘데없다고 말하는 것, 그래서 우리도 쓰잘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 어떤 것들의 고귀한 목록으로 한 권의 산문집을 만들었다.



도정일 /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문학동네 / 387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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