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에 불쑥 손을 집어 넣어 건져올리는 나이든 스승의 한 수...
*2014년 1월 1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p.4) <책을 펴내며> 중
트윗의 타임라인을 통하여 고종석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이 책 《밤이 선생이다》를 거론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호기심이 일었으나 그러한 호기심에 부화뇌동하는 것을 근사하지 않게 생각하던 즈음이라 곧바로 책을 구입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읽었고, 그들의 추천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난 4년간 한겨레신문에, 그리고 2000년대 초엽에 국민일보에 실었던 칼럼’인 글을 대부분으로 하여, ‘지난 세기의 80년대와 90년대’의 글들이 조금 곁들여진 산문집은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장이 특히 마음에 든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좋으시구나,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는 언어의 구사가 정갈하기 그지없다.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을 사용하였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읽는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 수도 있는 수사법은 물론이려니와 현란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울림으로 독자에게 당도하는 저자의 문장들은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의 품위를 높이는데 제격이다. 그런 저자의 생각의 편린들이 모두 좋지만 그 중 몇 가지만 따로 골라내어 남긴다. 저자의 생각과 그러한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을 닮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p.12) <과거도 착취당한다> (2009) 중
- <과거도 착취당한다>는 현재만이 아니라 흘러간 과거 또한 착취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현재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 오히려 과거가 착취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살펴주는 글이었다. 우리가 과거의 어떤 순간을 잊을 때 그 과거는 고스란히 착취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걸음 나아가 그렇게 착취당한 과거가 그 과거를 답습하는 미래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p.21) <소금과 죽음> (2009) 중
- <소금과 죽음> 은 죽음을 도외시하는 삶이라는 것이 결국 그 삶의 진위마저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은 자신의 삶을 그저 윤기 흐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일 때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스며드는 어떤 보기 싫은 흔적 또한 감내해야 하겠다고 마음 먹을 때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산문을 비롯해 책의 여러 곳에서 저자의 고향이 전라도의 섬 ‘비금도’였다는 것이 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도 군대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군대 문제는 여전히 젊은이들을 괴롭힌다. 대학에 입학한 남학생들이 한두 해를 방황 속에 허송하다가 ‘복학생 아저씨’가 되고 나서야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군대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p.23) <군대 문제> (2009) 중
- 의식적으로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류의 말을 나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뱉어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이면에 실제로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 저자의 <군대 문제>를 읽고 보니 무릎을 탁, 내려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맞다,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군대 생활이라는 삶의 방지턱을 넘지 않고서는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우리의 젊은 시절이 있었을 뿐이다.
저자의 짧은 산문들은 시류의 흐름을 보다가 손을 불쑥 집어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어신을 닮아 있다. (물론 두 번째 챕터는 사진과 함께 영화나 글을 끌어들인 일종의 문예 비평이 실려 있다고 보아야겠다.) 몇몇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금지곡을 양산한 여성가족부의 작태가 엄혹했던 유신 시절의 착한(?) 생각, 그러나 전혀 소용이 없었던 생각을 닮아 있었다고 지적한다거나 (<금지곡>), 영화 <죽어도 좋아>를 제한상영등급으로 결정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비겁한 결정과 어린 시절 동네 아낙의 야한 노래를 그저 그것대로 받아들이려한 노인의 혜안을 비교한다거나 (<장옥이 각시의 노래>), 그것이 설령 올바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돌덩이에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어떤 의제를 내세우는, ‘겸손하지 않은 도덕’이 가지는 폭력성을 질타하는 (<돌덩이의 폭력>) 방식으로 저자는 신의 한 수를 보여주고 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현산 / 밤이 선생이다 / 난다 (문학동네 임프린트) / 302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