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 후후후, 하고 존스 씨와 이중주로 나직이 웃고 나서 미야코 씨는 생각했습니다. 이 방은 존스 씨가 와 있으면 평소보다 통풍이 좋아진다고.” (p.37)
어쩌면 모든 사랑은 바로 이러한 순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항상 누리고 있던 공간이지만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기색을 품어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저 나만 느낄 수 있는 공기의 흐름일 수도 있고, 나만 맡을 수 있는 어떤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전보다 지금, 그 공간을 더욱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겠고요.
“... 미야코 씨는 그렇게 말하고, 존스 씨 눈앞에서 대문을 탁 닫았습니다. 계단을 사뿐사뿐 뛰어 올라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더니, 순식간에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그곳은 미야코 씨 집이므로 이도 저도 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존스 씨는 그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스 씨는 그때, 부당하게도 갑자기 미야코 씨를 빼앗겼다고 느꼈으며, 두 번 다시 같은 꼴을 당하고는 못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p.59)
사랑의 기척은 두 사람의 헤어짐의 순간을 극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아주 당연한 일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죠. 그러니까 미야코 씨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존스 씨가 억울한 심정을 느끼는 것과 같이 말이죠. 그래도 이것은 약과일 거예요. 지금 눈 앞에서 바라보고 있지만 그립고, 지금 당장 손을 맞잡고 있는데도 그것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외롭다는 식의 투정 한 번 안 부려본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정말 놀랄 일이었습니다. 존스 씨와 함께 있으면, 하루하루가 새롭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색이 넘치고 소리가 넘치고 냄새가 넘쳐난다는 것, 모든 것이 변화하며 모든 순간이 유일무이하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 따위가 무섭도록 선명하고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두 사람이 딱히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존스 씨와 함께 있으면 그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 하나하나가 갑자기 특별해집니다.” (p.104)
상대방이 떠난 공간, 상대방과 잠시 헤어지는 순간이 이렇게 달라졌다면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모든 일들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햘 것입니다. 매일 걷던 길이 어느 이국의 낯선 골목길로 변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요. 매일 마주치던 사람들이 영화 속의 씬 스틸러인 양 입체감을 갖게 되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일테고요.
“물론 미야코 씨는 히로시 씨가 좋았습니다. 적어도 그것이 맨 처음 떠오른 대답입니다. 하지만 어디가? 그렇게 자문해버리는 바람에 확신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남편이니까’라는 것이 미야코 씨의 솔직한 심정이고, ‘하지만 서로 좋아서 아내와 남편이 됐으면서, 남편이라서 좋다는 건 이상해’라는 것이 미야코 씨의 이른바 자기비판이었습니다.” (p.162)
아, 그런데 이제야 말하지만, 소설 속에서 점차 사랑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은 필드 워크라고 이름 붙인, 일종의 산책을 통해 서로를 구체적으로 느낍니다) 이 연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사실 미야코 씨에게는 히로시라는 남편이 있거든요. 존스 씨 또한 미국에 아내가 있고요. 물론 작가도 바보가 아니니 이들을 깨가 쏟아지는 부부로 그려 놓지는 않았습니다. 존스 씨는 그저 이혼을 안 해주면서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아내가 저기 멀리 바다 건네 있을 뿐이고, 음, 미야코 씨는 겉으로는 젠틀하고 부자인 남편으로 보이지만 실은 무심하기 그지없는 남편이 있는 것일 뿐이지요.
“... 확실히 나는 존스 씨와 있으면 평소 못 느꼈던 것을 많이 느꼈어. 바람을, 햇살을, 새소리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말았어. 자유를, 키득키득 웃고 싶어질 만한 비밀스러운 떨림을,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마음 든든함을 느끼고 말았어. 히로짱과 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신선한 기분을...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 건, 느끼지 말아야 할 것들을 느껴버린 탓인지도 몰라.” (p.186)
그래서 뭐, 사실 이 불온한 사랑(이라고 소설의 광고 카피에 되어 있더군요)이 그렇게 불온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미야코 씨가 히로시라는 세상 혹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함몰되어 있는 세상, 의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대단한 것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저 사랑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을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실로 대단한 것은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사랑보다는 사람이지요, 앞으로 지난할 사랑 이후 혹은 이후의 사랑을 앞두고 있는 히로시 씨와 존스 씨와 같은 사람이요...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두 사람은 아마 이후에도 잘 해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소설에서처럼 아름답고 극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에서처럼 선량하고 배려심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요.)
에쿠니 가오리 / 신유희 역 / 한낮인데 어두운 방 (眞晝なのに昏い部屋) / 소담출판사 / 247쪽 / 2013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