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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우리들 삶을 향하여 보내는, 깊은 숙고를 통하여 빚어진, 이토록 빛나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이상하게도 힘겹게 소설을 읽었다. 첫 번째 작품을 읽을 때 느꼈던 흥분은 그 다음 작품부터 급격하게 사그라졌다. 생소한 풍경을 바라보다 등장 인물을 놓치고, 등장 인물을 바라보다가 그 배경을 놓치게 되는 식으로 소설과 내가 자꾸 엇갈렸던 것만 같다. 뭔가 내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핏의 옷을 억지로 입었다 벗었다 한 기분이랄까.


「일본에 가 닿기를」.

가슴이 지잉, 하고 울릴만큼 좋았다. (그러나 그런 울림은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 여기까지 였다는 것이 좀...) 남편 피터와 함께 평범한 생활을 꾸려가는 그레타는 어느 날 파티에 참석하였다가 한 남자와 잠시 스치게 된다. 그리고 ‘가을과 겨울과 봄을 보내는 동안’ 매일매일 그 남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레타는 그 남자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며 그 남자가 일하는 신문사로 짧은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바라죠...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p.22) 그리고 이제 그 남자가 있는 도시로 어린 딸인 케이티와 함께 가는 기차 안에서 그녀는 그레그라는 젊은 남자와 짧은 정사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 잠시 어린 딸을 놓치게 된 그레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을 수습한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에는 그 남자 해리스가 있다. “그녀는 케이티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아이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손을 놓았다... 그녀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 (p.41) 이처럼 열린 결말인 스토리, 서구의 단편 작가들은 참 잘도 만들어낸다.


「아문센」.

교사로 일하기 위해 선택한 어느 시골의 학교... 그곳에서 만난 의사와 나는 그 한적한 곳에서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간다. 주변의 이런저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약속 하에 의사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 하지만 마지막 순간 의사는 내게 떠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저 그 말에 순응한 채 자신이 떠나왔던 곳 그 도시로 향한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후 두 사람은 우연히 기차역에서 마주친다. “여전히, 우리가 그 무리에서 빠져나오면 금방이라도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각자 가는 길을 계속 갈 것이라는 사실 또한 그만큼 확실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p.88)


「메이벌리를 떠나며」.

메이벌리에 있는 하나 뿐인 영화관, 그 영화관에서 영화표를 팔던 여자가 임신을 하면서 생긴 자리에 리아라는 아가씨가 들어오게 된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생활하며 철저한 보호 아래 영화관에서 표를 파는 일과 목사 부부네 집에서 옷을 다리는 일을 하던 리아... 그래서 레이라는 경찰관, 아픈 아내를 돌보느라 야간 근무를 자청한 레이가 리아의 귀가를 돕는다. 그러나 그런 리아가 어느 날 실종이 된다. 자신이 일하던 목사네 부부의 아들과 결혼을 하기로 하고 몰래 그 타운을 빠져나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내의 병이 심해져 도시로 나간 레이는 리아와 만나게 된다. 그 사이 아이까지 낳은 리아는 그 아이들을 목사네 부부에게 맡긴 채 이혼한 뒤였다. 그녀는 레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쓱 눈물을 훔친다. “당황하지 마요. 보이는 것처럼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냥 저절로 눈물이 나요. 평생 울 것만 아니라면 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p.115)


「자갈」.

남편을 떠나 닐이라는 남자를 따라 채석장 옆의 트레일러로 거처를 옮긴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따라 온 어린 우리... 그리고 그 채석장 옆의 고인 물가에서 어린 우리들 중 하나인 카로가 키우던 개와 함께 익사하게 된다. 카로는 익사하기 전 나를 엄마에게 보냈지만, 나는 그런 엄마에게 채석장 옆 작은 호수의 상황을 곧바로 전달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제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것에 붙들려 있다’.


「안식처」.

이모 부부의 집에서 지내게 된 내가 바라보는 두 사람 그리고 그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합 교회와 성공회라는 두 교회 스타일의 차이 그리고 이 사람들이 거주하는 시기의 토론토 사람들의 분위기에 대해 모르니 소설을 읽는 내내 답답하다. 도시로 나온 어린 소녀의 어떤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자존심」.

도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런저런 희로애락을 거치는 사람들과 함께 도시 또한 일종의 흥망성쇠를 거치게 된다. 하지만 도시의 다종다양한 사람들에게 그 도시의 흥망성쇠의 바로비터는 조금씩 다르게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나와 오나이다는 어떤 점에서 연대감을 가지고 물질적 흥함 속에서 사라져가는 어떤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된다.


「코리」.

불륜을 저지르고 그 불륜을 눈치 챈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은 코리는 자신의 불륜 상대인 그를 시켜서 그 누군가에게 돈을 보낸다. 그리고 코리가 짐작하는 릴리엔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코리는 그렇게 보낸 돈이 실제로 릴리엔에게 갔던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된다. 얽히고설킨 이 상황은 정말 어떤 사기극의 한 장면이 되는 것일까...


「기차」.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잭슨은 도착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곳에서 뛰어 내린다. 그리고 흘러들어간 어느 외딴 집에서 벨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잭슨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벨의 집에서 묵기 시작한다. 그녀가 나이가 들고 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그렇다면 잭슨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물론 앨리스 먼로의 다른 소설들에서처럼 그 이유는 모호하기만 하다. 자신을 학대하였던 계모가 아직 있어서? 아니면 자신과 사랑이라기도 부르기 어색한 어떤 관계에 있던 일린 때문에? 그리고 잭슨은 벨이 죽은 후 자신이 관리인으로 일하던 어떤 집에서 자신의 딸을 찾으러 온 일린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호수가 보이는 풍경」.

호수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요양원, 그곳에 있는 샌디라는 이름의 여자... 자신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경계에 있는 그 여자의 모호한 상태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쩐지 읽으면 꽤 쓸쓸해져버린다.


「돌리」.

“내가 당신에게 보낸 편지가 오면 찢어버려요... 문제는 그가 내 부탁대로 할 거라는 점이다. 나라면 그러지 않는다. 어떤 약속을 했건 나는 편지를 뜯어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시킨 대로 할 것이다... 그가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나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존경스러울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함께했던 삶 전체가 그랬다.” (p.330)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고 나서 재미없다고 투덜댈 수만은 없게 만드는, 이토록 빛나는,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숙고를 엿보게 만드는 문장들이라니...


- 아래의 내 개의 단편은 <피날레>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것들은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자전적이지만 때때로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라고 한다. 더불어 작가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밝히는 ‘가장 내밀한 작품’이란다. -


「시선」.

‘내가 다섯 살 때 난데없이 남동생이 태어났고’ 또 일년 뒤에는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나는 세이다라는 젊은 여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그래봐야 열여섯에서 스물 사이였을 것이지만 내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하게 된 어른 여성인 세이다... 하지만 내가 많이 따르던 세이다는 죽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이끌려 세이다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리고 관 속의 세이다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눈꺼풀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그녀라면, 당신이 그녀의 몸속에 들어갔다면 속눈썹 사이로 밖을 바라볼 수 있을만큼만. 어디가 밝고 어디가 어두운지 분간할 수 있을 만큼만.’ 들어올린 그녀의 눈꺼풀을...


「밤」.

어린 시절 나는 여동생에게 어떤 살의를 느낀 적이 있다. 여동생의 목을 조르게 될까봐 두렵다는 사실을 우연히 아버지에게 말한다. 지금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딸에게 심리치료를 받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병원에서 준 에테르의 영향일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을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런 생각을 한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의 말 덕택에 나의 그런 생각들은 그세 사리지게 된다. ‘나는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목소리들」.

나의 어머니는 동네에서 하는 댄스 파티에 참석하기를 즐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자들에 둘러싸인 채 울고 있는 페기, 청년의 손이 허벅지를 쓰다듬는 동안 가만히 있는 페기, 그리고 그녀의 올라간 스커트 사이로 스타킹을 고정시킨 패스너를 본다. 나는 내가 본 것들을 떠올리고, 그 영상 속의 그들 페기와 청년들은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내 에로틱한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 모두 떠나버렸다.


「디어 라이프」.

나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병을 앓았고 일찍 죽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의 집을 떠올린다. 그 집에서 벌어졌던 어떤 일,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던 어머니와의 어떤 사건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속내를 드러낸다. 아래가 그 문장인데, 이 노작가의 눅진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그때 내가 정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벤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pp.415~416)


참 이상하다. 나는 분명 이 소설집을 참 힘겹게 읽었다. 선배에게 이 책에 대해 말하며 첫 번째 단편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고 그것은 작가의 생활 반경에 제대로 흡수되지 못한 탓 같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리뷰를 쓰면서 (다른 소설집의 리뷰를 쓸 때보다 두 배쯤 시간이 걸렸다) 다시 작품들을 복기하게 되었는데, 실제 소설들을 읽을 때보다 훨씬 좋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다시 읽고 싶다는 느낌마저 받게 되었으니, 그것참 이상하다...



앨리스 먼로 / 정연희 역 / 디어 라이프 (Dear Life) / 문학동네 / 437쪽 / 201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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