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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볼피 《세계 아닌 세계》

20세기를 관통하며 발견된 우리들 인간 그리고 이 세계의 암울한 맨 얼굴

by 우주에부는바람

20세기 지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재앙에 가까운 세계 대전의 참화를 겪은 이후 우리들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 보다 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현격하게 과학 문명을 발전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진 20세기의 역사가 우리들을 보다 인간적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제반 여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인간의 방향으로 우리 인류가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


소설은 ‘전쟁의 시간 1929 ~ 1985’, ‘돌연변이 1985 ~ 1991’, ‘인간의 본질 1991 ~2000’이라는 시기별로 구분된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바로 우리들 현대사 속의 이러한 고민들을 살피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구소련의 생물학자와 반체제 인사 부부인 이라나와 아르카디 그리고 그들의 딸인 옥사나, 미국 정치가 집안의 두 딸인 제니퍼와 앨리슨 그리고 제니퍼의 남편인 야심에 가득한 잭 웰스, 헝가리 태생으로 서유럽과 미국을 넘나드는 천재 유전공학자인 에바 할리슈와 소련의 소수 민족 지역에서 태어나 소련 붕괴 과정을 직접 겪는 언론인인 나 유리 미하일로비치가 있다.


시기적으로 1900년대 전체를 다루고 있는 소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구소련과 미국을 비롯해 동유럽과 서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까지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20세기 현대사를 종으로 횡으로 망라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첫 장면에 기록되는 체르노빌의 원전 사고를 비롯하여, IMF의 탄생과 제3세계가 세계 금융 안으로 흡수되는 과정, 고르바초프와 옐친으로 이어지는 소련의 민주화 과정과 이에 대항한 구데타 그리고 이어지는 러시아의 자본주의화, 갑작스러운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 붕괴 이후 소수 민족들의 분규, 유전공학의 발달과 게놈 프로젝트,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팔레스타인 문제까지 바로 이 한 권의 소설 안에서 마주치게 된다.


게다가 한 권으로 읽는 20세기 현대사라고 불러도 무방한 소설은 얼렁뚱땅 희망 섞인 결말을 내놓고 있지 않다. 일종의 희망고문으로 우리를 달래는 대신 소설은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마지막을 절망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내와 남편은 단순한 이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념에 배신당하고 그러한 배신은 일종의 밀고로 이어진다. 아이는 부모와 결별한 채 또 다른 자본의 숙주로 길러지거나 자본에 기생하는 이들에 의해 죽어간다. 과학은 과학 자체로 연명하지 못한 채 과거에는 정치에 그리고 지금은 자본에 의해 좌우되고 있고, 정치와 자본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만 활동할 뿐 결코 세계와 인간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20세기를 관통하는 소설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 속에서 우리들 20세기의 발전 방향을 바로 잡으려는 미미한 노력을 한 앨리슨, ‘세계는 존재하지 않아... 단지 우리가 만든 감옥만 있을 뿐이지.’라고 말하는 앨리슨이나 20세기의 흐름과는 전혀 무관한 듯 그저 그 산물로 존재하지만 예언자적인 옥사나,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구데타 세력과 자본주의를 정착시키려한 옐친 세력 사이의 혼돈 가운데에서 ‘모두 똑같아요.’라고 말하는 옥사나가 결국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말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암울함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도무지 어떤 희망도 찾아내기 힘든 소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20세기는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의 시간’이었으며, 그러한 전쟁의 시간을 겪으며 ‘돌연변 되어버린 세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시간들을 통하여 보다 명확하게 ‘인간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하나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21세기에 당도하였다. 인간의 본질마저 변형시킨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지난 세기의 수많은 사건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아마도 그 결과가 바로 21세기의 세계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호르헤 볼피 / 조혜진 역 / 세계 아닌 세계 (No Será la Tierra) / 천권의책 / 707쪽 / 20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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