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허약한 인간에게 바치는 놀'납'도록 경이로운 헌사...
여기 이제 팔십에 가까운 한 노인이 있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지금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그는 이년 전에는 아내인 사라를 잃었고, 이십여 년 전에는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흐려지는 시야 그리고 그와는 달리 또렷하기만 한 과거를 글로 옮겨 적고 있다. 완전히 시력을 잃었을 때를 대비하여 집안 일을 돕고 있는 앙헬라에게 자신이 구술하는 것을 받아 적도록 한다.
“...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 거의 혼자 힘으로 모호하고 변화무쌍한 것을, 사물의 불안정성을 잘도 표현해 낸다. 언어는 세상을 닮았다. 불길에 휩싸인 집처럼, 떨기나무 불꽃처럼 불안정하다... 앞에 쓴 글 어딘가에서 나는 언어란 엉성한 도구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유연하다고 말하고 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엉성할 수도, 유연할 수도 있다.” (p.200)
소설은 앙헬라에게 구술하는 중인 한 인간의 회고록과 저자의 소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그러니 소설 전체가 질서 정연하지는 않다. 소설 속에서 노인은 아주 젊은 시절로 돌아가 사라와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콜롬비아에서 뉴욕으로 이주를 하는 상황이 나오기도 하고, 그림에 대한 화가의 이런저런 생각이 나오기도 하며, 현재로 돌아와 앙헬라의 남편의 불륜이 등장하기도 한다. 시간의 순서는 무시되고 불쑥불쑥 (난폭하다 여겨질만큼) 삶의 어느 순간이 튀어 오른다.
“삶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뒤섞여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진다. 무엇이 하찮은 일인지,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어떤 일이 더 중요하고, 어떤 일이 덜 중요한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사물에 어떤 질서가 있는지, 그저 제멋대로 움직이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pp.217~218)
하지만 그러한 중에도 자동차 사고를 당한 큰 아들인 하코보와 그러한 하코보를 돕기 위하여 자신의 청춘을 포기한 파블로가 함께 떠난 여행, 그리고 그 여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라는 큰 줄기는 흔들리지 않는다. ‘잠을 자는 동안 죽음이 찾아오면 좋겠어요... 깨어 있을 때 죽음이 찾아와도 그 역시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남은 삶을 그저 유지해야 하는 하코보, 그리고 그러한 하코보를 돌보는 파블로가 떠난 여행의 의미는 너무 커다랗기만 해서 섣불리 입에 담기조차 힘들다. 그들의 여행을 먼 곳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이 느끼는 참척을 앞둔 슬픔은 언어로 설명 가능한 영역의 바깥에 있다.
“슬픔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동적이며 불안정하다. 그리고 그 불꽃은 오렌지색이나 붉은색이 아니라 짙푸른 색이다. 때로는 끔찍할 정도로 창백한 녹색을 띠기도 한다. 슬픔의 불꽃은 몸 안에서 한쪽 옆구리를 물어뜯으며, 때로는 다른 쪽 옆구리를, 때로는 몸 전체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찢어발긴다. 우리가 고요 속에서 비명을 내지를 때까지...” (pp.128~129)
하지만 나는, 이제 눈이 멀어가고 팔십이라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는 나는 여전히 살아내고 있다. 아들을 잃었고 아내를 잃었으며 시력조차 사라져가는 나는 살아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구술이라는 방법을 택하면서까지 적어 내고 있다. 거대한 슬픔도 삶의 테두리 안에 있는 동안에는 다른 여타의 감정들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님을, 언어나 색이나 어떤 예술의 도구를 사용하든 우리들의 삶은 그러한 결과물 그 이상임을 주인공인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원고의 마지막 부분을 앙헬라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다. 앙헬라는 맞춤법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했다. 나는 그녀가 이거나 저거나 매일반이라고 언젠가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걱정 말아요. 어떻게 쓰든 의미는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내가 말하려는 것은 한 마디 뿐이니까... 나는 그녀를 달랬다.” (pp.230~231)
그렇게 가정부인 앙헬라에 의해 작성되는 소설의 마지막 단어 ‘놀납도다!’ 는 그야말로 독자인 우리로 하여금 놀랍도다, 라고 외치도록 만든다. 많은 것을 잃었고 아니 거의 대부분을 잃었고 게다가 지금도 잃어가고 있는 노작가의 회고록 마지막 단어가 놀랍다, 라는 의미인 것도,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그가 가정부의 손을 빌려 작성한 마지막 단어가 ‘놀납도다’라는 잘못된 맞춤법으로 마무리 된다는 것도 놀랍다. 어떤 어두운 슬픔과 어떤 깊은 상실에 거역하려 했던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모든 슬픔과 모든 상실을 끌어안은 허약한 ‘인간’에게 바치는 헌사로 이처럼 훌륭하게 어리숙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토마스 곤살레스 / 김현철 역 / 멀어지는 빛 (La Luz Dificil) / 천권의책 / 236쪽 / 2014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