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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우리 같지 않은 외연과 우리가 모르던 내면의 조우...

by 우주에부는바람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은 하루키의 초기작들이다. ‘장편을 쓰고 나면 막연한 후회가 남아서 단편을 한꺼번에 쓰고, 단편을 몇 개 한꺼번에 쓰고 나면 그건 그것대로 아쉬워서 장편에 착수하는 그런 패턴’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지금의 하루키와는 다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상실의 시대>, <댄스 댄스 댄스>를 읽던 시절의 하루키를 다시금 떠오르도록 만들어주었다. 아련하고 모호하였다.


「반딧불이」.

“나는 그것을 확실히 인식했다. 그리고 인식함과 동시에 그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주 어려운 작업이었다. 나는 아직 열여덟 살이었고, 사물의 중간점을 찾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p.31)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던 시절의 친구는 죽음을 택했고 나는 살아 남았다. 대학에 진학하였고 이상한 습관을 가진 룸메이트가 있고, 죽은 친구의 여자 친구와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데이트,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는 그런 만남을 갖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와 잔다. 그리고 그녀는 떠난다. 떠난 그녀로부터 편지를 받은 그달 말, 룸메이트는 내게 병 속에 든 반딧불이를 건넨다, 여자에게 주면 좋아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나는 옥상에 올라가 반딧불이를 풀어 놓는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던 반딧불이는 어느 순간 날아 오른다, 그리고 날아간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p.48)


「헛간을 태우다」.

하루키는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우리 같지 않은 외연을 만들어 우리가 잘 모르는 우리의 내면 옆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사라지는 재주가 있다, 혹은 있었다. 단편을 읽고 트윗의 타임라인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인간의 행동양식 같은 걸 잘 알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설가란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얘기한 겁니다.” (p.67) 어쩌면 하루키의 나름대로의 소설론 같은 것이 투영되어 있는 단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대로 즐길 수 없으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태워지는 ‘헛간’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아마도 하루키는 소설 속의 ‘나’를 통해 그렇게 발견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헛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춤추는 난쟁이」.

춤추는 난쟁이가 등장하는 일종의 우화이다. 어쩌면 전공투 세대에 대한 일종의 은유가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했으나 필요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건 하루키의 창작 스타일도 아니고, 나의 독서 스타일도 아니야, 라고 여겼다. “넌 몇 번이고 이길 수가 있어. 그러나 지는 건 단 한 번이야. 네가 한 번 지면 모든 것은 끝난다. 그리고 넌 언젠가 반드시 진다. 그걸로 끝이야. 알겠어? 나는 그걸 계속 기다릴 거야.” (p.117) 언젠가 한 번은 이긴다, 가 아니라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진다, 라니 절묘하게 하루키스럽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아주 옛날에 지금과 똑같은 풍경을 본 적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한 때 모든 소설들이 ‘기시감’을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면 그 맨 앞줄에 하루키가 있었던 것도 같다. 그 기시감 속에서 떠오른 오래 전 친구의 여자 친구를 병문안 갔을 때 그녀에게서 들었던 ‘장님 버드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 함께 현재의 나 그리고 함께 병원을 가는 사촌동생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물론 그것이 아주 평행하게 달라 붙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잘 듣지 못하는 사촌동생과 나의 대화는 역시나 과거시제로 신선해 보인다.


「세 가지의 독일 환상」.

‘겨울 박물관으로서의 포르노그래피’, ‘헤르만 괴링 요새 1983’, ‘헤어 W의 공중정원’이라는 세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 개의 짧은 이야기들인데 아마도 여행을 좋아하는 하루키가 독일을 방문하는 중에 떠올리게 된 것들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역 / 반딧불이 / 문학동네 / 194쪽 / 2010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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