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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 《저지대》

폭력의 연쇄가 만들어낸 가련한 인간들의 가혹한 운명을 서술하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을 절반쯤 읽었을 때였을까, 나는 이대로 질식할 것만 같아 심호흡을 하며 잠시 책을 덮었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고 가슴에 올려 놓은 손이 옅게 흔들렸다. 주먹을 아주 세게 쥐었다가 새끼 손가락부터 차례대로 풀어냈다. 소설의 절반을 읽는 동안 나는 흔들리는 영혼들, 이미 죽음을 맞이한 우다얀의 영혼뿐만 아니라 살아남아서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수바시와 가우리의 영혼에 잔뜩 주눅 들었다.


수바시와 우다얀, 그리고 가우리의 운명은 소설을 읽는 이들을 한 번 휘감은 뒤에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유약한 형 수바시를 대신하여 경찰에게 대들던 동생 우다얀은 청년이 된 후에도 성정이 바뀌지 않는다. 독립한 인도의 민중들을 위한 새로운 혁명 그룹에 가입하게 되는 우다얀의 운명은 이미 어린 시절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동생을 불안감 속에 바라보는 수바시의 운명 또한 어린 두 사람이 함께 저지대를 가로지르던 때를 기원으로 삼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어느 하루가 다음 날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날로 이어질 거라는 확신과 결합된 열망이었다. 그것은 숨을 참고 멈추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우다얀이 저지대 속에서 그렇게 하려고 애썼던 것처럼, 그럼에도 어떻게든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시간이 가만히 있으면서도 동시에 흐르는 것처럼, 그녀가 자각하지 못하는 몸의 다른 어떤 부분이 산소를 빨아들이며 그녀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p.179)


그리고 수바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던 70년대 초반 우다얀의 삶은 끝이 난다. 그러나 그렇게 끝이 난 것 같은 운명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 가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모습으로 시작된다. 우다얀은 알지 못하였지만 가우리는 이미 우다얀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이제 가우리는 우다얀이 없는 집에서 우다얀이 남긴 생명체를 품은 채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저 동생이 보낸 사진 속의 한 여인으로만 알고 있던 가우리, 동생의 아이를 품고 있는 가우리를 수바시는 바라본다.


“그녀는 불행한 기색을 비친 적이 없고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다얀이 보내준 사진 속의 미소 띤 여자, 걱정이 없어 보이던 여자, 수바시의 첫인상이었던 그 모습, 수바시도 끄집어내고 싶은 모습, 그녀의 그런 부분을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p.254)


결국 수바시는 어쩔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운명과도 같았던 동생을 대신하여 가우리 그리고 가우리가 품고 있는 아이까지를 데리고 다시 미국을 향한다. 그곳에서 가우리는 딸 벨라를 낳지만, 벨라가 몸을 빠져나가는 순간 마치 빈 껍질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가우리와 수바시는 아무도 그들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미국에서 부부라는 형태로 살아가지만 가우리에게 그것은 여전히 잔혹하다. 벨라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수바시는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따라 벨라와 함께 인도로 향한다. 그렇게 몇 주간의 공백 후에 돌아왔을 때 가우리는 없다. 가우리는 수바시가 벨라에게 자신이 이땅에 도달하게 된 가혹한 운명을 언젠가 이야기 해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두 사람을 떠난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벨라가 다가가는데도 벨라를 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곁에 와서 섰을 때도 벨라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아빠의 얼굴은 달라 보였다. 뼈가 약간 이동을 한 것처럼. 뼈의 일부가 없어진 것처럼.” (p.337)


하지만 수바시는 어린 벨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어린 벨라는 계속 성장하지만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만 같다. 가우리가 빠진 자리를 수바시는 온전히 메우지 못한다. 몇 년에 걸친 상담 치료와 함께 벨라는 학교를 마치게 되지만 수바시와 함께 사는 안정적인 생활 대신 안착하지 않는 유랑의 삶을 택한다. 그러한 벨라는 서른이 넘은 어느 날이 되어서야, 벨라를 떠난 가우리보다 좀더 나이가 들어서야 수바시에게 온전히 돌아온다.


“엄마의 부재는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그 모든 복잡성과 미묘한 차이는 수년 동안 공부한 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도 외국의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p.408)


이제 칠십이 넘은 수바시는 어느 날 가우리에게 이혼 서류를 보낸다. 헤어진 이후 최초의 연락이었고, 가우리는 사인을 한 서류를 들고 수바시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가 마주한 것은 벨라와 그녀의 딸 메그나이다. 그리고 벨라는 가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이미 수바시를 통하여 우다얀의 존재를 알고 있는 벨라이지만 자신을 떠나고 그 이후 자신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가우리를 매몰차게 대한다. 그리고 가우리는 수바시와 함께 떠난 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 우다얀과 처음 만났던 곳이고 우다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인도를 찾아간다.


“이곳의 풍경이 이처럼 바뀌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40년 전 그날, 그 가을 저녁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채 2년이 안 되는 사이에 그녀는 아내로 시작해서 과부로, 예비 엄마로, 그리고 범죄의 공범으로 끝맺었다.” (p.508)


인도의 독립과 그 이후 범람하던 혁명의 기운 속에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스러져야 했던 한 청년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3대 혹은 4대에 걸친 현대판 유랑의 대서사시가 되었다. 우다얀의 죽음 보다는 그 죽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남은 생을 보내야 했던 모든 사람들, 우다얀의 형 수바시와 그의 아내 가우리, 그리고 그의 딸 벨라와 그의 어머니인 비졸리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의 삶이 가혹하고 애달프다.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는 줌파 라히리의 투명하고도 건조한 문장은 오히려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를 더욱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작가는 모든 사건과 인물들을 문장으로 앞서가려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들이 시간을 두고 아주 느리게 그러나 충분히 스며들도록 만드는 인도 현대사의 진혼곡을 격앙됨 없이 들려준다. 거대한 역사 속 폭력의 연쇄가 만들어낸 가련한 인간들의 가혹하였던 운명, 섣부르게 이입할 수조차 없는 그들 사이에서 삼일을 헤매고 다녔다.



줌파 라히리 / 서창렬 역 / 저지대 (The Lowland) / 마음산책 / 543쪽 / 201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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