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역사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운명들을 향하여...
“... 그는 어떤 곳에서는, 라헬이 떠나온 나라 같은 곳에서는, 여러 가지 절망이 서로 우위를 점하려고 다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 개인적 절망은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는 것, 개인적 혼란이 느닷없이 거대하고 난폭하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휘몰아치는 터무니없고 제정신이 아닌, 그래서 손을 쓸 수 없는 대중적이고 국가적인 혼란에 맞닥뜨렸을 때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다는 것, 큰 산이 열풍처럼 울부짖으며 복종을 요구하면 작은 신 (포근하고 조심스럽고 사사롭고 제한적인)은 움찔 놀라서 자신의 무모한 만용을 슬며시 비웃으며 가버린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p.35)
라헬이 유학 중에 만났던 남자인 미국인 래리는 아마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많은 이들은 소설 속 에스타와 라헬 그리고 아무와 벨루타가 겪은 절망의 근처에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커다란 역사의 한 켠에 자리한 사소한 인간, 그 역사가 거대한 것들을 움직이는 신에 의하여 계획되었다면 그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이리로 저리로 휩쓸리는 인간의 움직임은 어쩌면 ‘작은 것들의 신’에 의해서만 살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는 바로 이 ‘작은 것들의 신’의 시선 안에서 이 가련한 인간들의 행적을 쫓는다.
“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미워하려고 해보았다. 그 여자는 그들 중 하나야, 그들 중의 또다른 하나일 뿐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웃을 때면 깊은 보조개가 생겨. 그 여자의 눈은 언제나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어... 역사의 갈라진 틈을 통해 광기가 살금살금 새어 들어왔다. 그러는 데는 한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p.271)
그런데 소설의 발단 그러니까 이 가련한 운명의 시원을 어디로 보아야 할런지는 애매하다. 그것은 어쩌면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발발한 어느 지점으로 보아야 할 수도 있고, 혹은 그러한 카스트 제도의 존속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일정 부분 자유를 갖게 된 시기로 보아야 할 수도 있다. 더욱 좁혀 보자면 이후 인도에 혼란스러운 채로 들어온 사회주의 사상이나 그러한 사상에 의하여 개화된 계층의 등장이 이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상실의 신, 작은 것들의 신.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p.278)
아니 이 모든 바뀌지 않는 역사적 현실이 존재하였다고 하더라도 아무와 벨루타, 가촉민 그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집안의 딸인 아무와 타고난 영민함과 함께 멋진 외모까지 갖춘 듯한 불가촉 천민 벨루타가 서로에게 이끌리지 않았다면 소설 내내 우리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가련한 운명의 조합은 만들어지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혼을 한 후 라헬과 에스타라는 이란성 쌍둥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무, 자신의 재주에도 불구하고 불가촉 천민이기 때문에 세상을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온 벨루타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날 아침 에스타와 라헬이 목격했던 것은, 비록 당시에는 알지 못했더라도, 통제된 상황에서 (누가 뭐래도 그것은 전쟁이나 대량 학살은 아니었다) 지배권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냉철하게 증명해 보인 행위였다. 구조, 질서, 완전한 독점. 그것은 신의 목적으로 가장하여 미성년 관객에게 실체를 드러낸 인간의 역사였다.” (p.378)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운명의 자장 안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에스타와 라헬이 있다. 아무의 어린 아들과 딸, 강을 건너 벨루타의 집에 찾아가기를 즐겨하였던 쌍둥이 남매, 운명의 날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벨루타의 린치 장면을 목격해야 했고, 그에게 합당하지 않은 죄를 덧씌워야 했던 또다른 편의 가련한 운명이 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건 이후 서로에게 닿아 있는 정서적인 끈을 억지로 끊어내야 했으며, 젊은 나이에 죽은 엄마와 그 엄마가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며 이미 오래전 끝이 난 삶을 살아냈다.
“... 파란 누비 침대보 위에서 웅크리고 잠이 든 작은 가족에게는 무엇이 찾아왔을까? ... 죽음은 아니었다. 단지 삶의 종말일 뿐.” (pp.392~393)
소설은 여기저기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주는 친절함을 베풀지 않는다. 그저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조각들을 그러한 채로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이곳에 혹은 저곳에 맞춰보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대신 자신이 살고 있는 땅과 그 땅 위의 사람들의 운명을 향한 작가의 사랑은 - 사건에 대한 묘사와는 다르게 - 정밀한 풍경 묘사들을 통해 구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불친절함이 오히려 독자를 자극한다. 또한 이러한 불친절함 속에서 이들의 고약한 운명을 향한 어쩔 수 없는 간절함이 솟아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보상해주는 것은 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수면 위로 올라오는 아무와 벨루타의 사랑 장면이다. 이를 놓친다면 아주 아쉬울 것이니 어떻게든 끝까지 읽는 것이 좋다.
아룬다티 로이 / 황보석 역 / 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 / 문이당 / 414쪽 / 1997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