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왕실의 흑역사를 헤집는 일본 작가의 어떤 방식...
나카노 교코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화에 얽힌 뒷 이야기, 특히나 읽으면 섬찟하다 싶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는다. 그림 자체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그림을 둘러싼 인물 그리고 사건들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그저 명화라고 여기던 그 그림들 안에 숨겨져 있는 사실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림 자체보다는 그 그림이 그려진 시기의 역사와 역사적 인물에 대해 더욱 많은 품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참수형이 왜 왕후귀족을 위한 처형방식이 되었느냐면 교수형에 비해 고통이 적고 순식간에 죽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늘 잘 되지는 않았다... 메리 스튜어트를 담당했던 형리는 동요한 채로 도끼를 치켜들었다. 최초의 일격은 목이 아니라 뒤통수에 떨어졋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왕의 모습에 더욱 당황한 그는 두 번째 시도에서는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다. 목덜미에 맞기는 했지만 피가 뿜어 나왔을 뿐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세 번째에야 겨우 잘라낼 수 있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목을 벤 뒤에는 늘 그랬듯 그 머리칼을 움켜쥐고 높이 치켜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형리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머리칼인 줄 알았는데 실은 메리가 자신의 백발을 숨기기 위해 썼던 가발이었다. 가발을 움켜쥐었으니 머리는 바닥에 쿵 떨어지고 말았다. 그냥 떨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p.19)
이번 책은 이러한 저자가 유럽 황실을 그 주무대로 삼고 있다. 몇몇 알만한 그림들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그림들 보다는 근대 유럽의 역사 중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왕과 왕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 첫 번째는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의 이야기이다. 그림 속 화려한 메리 스튜어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저자의 묘사가 그로테스크하다. (저자는 ‘무서운 그림’ 시리즈를 내고 있다.)
“뛰어난 화가와 위대한(또는 악명 높은) 군주가 같은 시대를 살아서 걸작 초상화를 남긴 예는 의외로 적다. 뒤러와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를 섬겼던 티치아노, 헨리 8세와 홀바인, 나폴레옹과 다비드 정도일까. 한편 뛰어난 화가가 평범하고 변변치 못한 군주를 그린 예로는 벨라스케스와 펠리페 4세를 비롯하여 반데이크와 찰스 1세, 고야와 카를로스 4세, 루벤스와 마리 드 메디시스(앙리 4세의 왕비) 등이 금방 떠오른다. 그 밖에는 곁에 좋은 화가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 예카테리나 2세, 표트로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 마리아 테레지아 등 강렬한 개성을 지닌 군주가 단조로운 초상화의 틀에 갇혀 허덕이고 있다.” (pp.63~64)
두 번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바르가리타 테레사’라는 이야기인데,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표지에도 사용된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 인물들의 가계가 그려지고 있다. (이 표지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1656년작 <라스 메니나스>이다.) 이와 함께 우리에게 남은 그림들과 그림 속의 군주, 그리고 그림을 그린 화가 사이의 매칭도를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다.
“... 아나스타샤의 죽음과 함께 이반의 마음속 무언가가 깡그리 죽어버렸다... 이때부터 진짜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아나스타샤가 죽어 사라지자,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차르에게 줄곧 현명한 조언을 해왔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녀야말로 이반의 잔학함을 억눌러왔던 것이다. 이제 늑대가 들판에 풀려난 형국이었다. 어머니와 아내, 사랑하는 두 여성을 모두 독살로 잃었다 여긴 차르는 절망에 빠졌고, 음모에 대한 두려움에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려고 분노와 복수의 덩어리가 되었다.” (p.102)
세 번째는 ‘이반 뇌제와 황비들’이다. 러시아의 초대 차르이기도 한 이반 뇌제의 잔혹한 폭정이 그려지고 있는데, 책에 실린 그림 속의 이반 뇌제를 볼라치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실상이 이해가 간다. 다만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어떤 잔인함을 다스려주었던 두 명의 여성, 그러니까 이반 뇌제의 어머니와 아나스타샤가 좀더 오래도록 그의 곁에 머물렀다면 뭔가 달랐을까 하는 의구심은 남는다.
“... 조지 1세는 잉글랜드 역대 국왕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미움을 받는다.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끈질기게, 그리고 철저하게 괴롭혔을 뿐 아니라 외양도 남에게 호감을 줄 만한 구석이 없었고, 술을 퍼마시고 횡설수설하는 등 천박한 행동거지에 교양도 없었고, 잔혹함과 소심함으로 비비꼬인 정신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얄궂게도 잉글랜드 의회 제도의 발전에 조지 1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치에 대해 흥미도 능력도 없었고, 잉글랜드가 어떻게 되든지 관심도 없었던 터라 1년에 반 이상은 하노버에서 한가하게 지냈고, 정무는 수상 월폴에게 내맡겼다. ‘월폴의 평화’라고 찬양받는 장기안정 정권을 유지했던 월폴은, 왕에게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게오르크, 즉 조지에게 딱 맞는 역할이었다. 여기서 잉글랜드의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 (p.173)
네 번째는 ‘조지 1세와 조피아 도로테아’이다. 독일 하노버 공국의 제후였던 게오르크가 갑작스럽게 영국의 왕이 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조피아 도로테아’가 어떤 식으로 왕에게 속아 성에 갇히게 되고, 또 그렇게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피붙이들로부터도 소외된 채 살아야 했나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한다. 평생을 성에 갇혀 산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 남편이었던 조지 1세는 납으로 된 관에 담아 그 성의 지하에 묻으라고 하였다니, 음...
“앤 불린은 미녀가 아니었다. 잠자코 서 있는 것만으로는 남성의 눈을 끌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어봐야 비로소 매력을 알아차리게 된다. 회화의 내용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프랑스 궁정에서 배운 우아하고 야릇한 거동이 투박한 헨리를 현혹했다. 위트와 코게트 French Conquette 즉, 밀고 당기는 여인의 요염함, 이는 주위의 다른 여성들에게는 없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p.210)
다섯 번째 이야기는 꽤 유명한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이야기이다.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장본인인 앤 불린이 어떻게 이미 결혼을 한 상태인 헨리 8세의 새 부인이 되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보다는 헨리 8세의 왕비들 잔혹사 (헨리 8세는 여섯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이중 두 명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를 참수형에 처했다) 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유럽 황실의 흑역사라고 할만한 다섯 편의 이야기가 몇몇 그림들과 함께 그려지고 있는 책이다. 물론 그 각각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도무지 머릿속으로 그려내기 힘든 당시 궁정의 상황들과 감응하기는 쉽지 않다.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스페인, 독일, 러시아 등의 왕가가 종으로 횡으로 얽혀 있으니 그 가계를 따라가기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몇몇 중세 유럽 왕가의 뒷이야기 정도로 보면 되겠다.
나카노 교코 / 이연식 /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 유럽 5대 왕실에 숨겨진 피의 역사 (殘酷な王と悲しみの王妃) / 이봄 / 문학동네 임프린트 / 239쪽 / 2013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