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따분한 사회라서, 더욱 깨닫기 힘든 우리 내면의 '권태'를 위하여..
“행복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기쁨이라면 쾌락은 순간적인 자극, 특히 관능적 자극으로 그러한 자극이 부재하는 상태가 권태다. 영어의 권태가 흥미진진함 interesting과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시사해주는 것이 많다. 흥미진진한 자극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권태의 감정도 있을 수 없다. 권태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때에도 발생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흥미로워야 한다는 기대나 뭔가 흥미진진한 오락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 빈 공간은 권태의 몫이 된다.” (p.12) - 서문 중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속도가 빠른 현대 사회의 여려 나라 중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에서, 또한 여전히 다른 어느 나라 부럽지 않은 높은 수준의 노동 시간과 노동 강도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되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속도와 시간과 강도와는 무관해 보이는 ‘권태’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역시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성인들의 삶이 실제로 지루한 이유는 그것이 근현대의 자본주의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주인’인 자본가에게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에게 세계는 언제나 넓고 할 일은 많다. 자본주의를 이끌고 가는 것은 자본가와 노동자이지만, 그것을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노동자를 위한 체계라기보다는 자본가를 위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p.30) - 이성민 <권태와 청춘> 중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흔하게 경험하거나 혹은 경험하고 있다고 여기는 ‘권태’에 대하여 <몸문화연구소>에서 이루어진 독회와 토론의 과정의 결과물이다. 연구소의 연구원들과 몇몇 외부 필진이 함께 한 기록물들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 이후 여덟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첫 번째 글은 꽤 지루(?)하니 (글의 제목이 <지루함의 철학>이고 데카르트, 스피노자, 하이데거를 거론하고 있으니 오죽...) 이후의 더 재미(?)있는 글을 읽기 위해 건너 뛰어도 무방하겠다.
“... 게으름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행동의 부재라면, 따분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자극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반대로 지루함은 너무 많은 일과 행동의 틈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전근대에는 뭔가 자극적인 사건이나 정보가 부족해서 탈이었다면, 현대는 자극과 정보의 과부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루함은 자극적인 사건과 정보가 포화된 상황에서 우리가 꾸역꾸역 게워내는 감정이다... 따분함이 근대의 문턱을 넘으면서 권태로 바뀌는 것이다.” (pp.61~62) - 김종갑 <근대의 증상으로서 지루함> 중
일단 글들은 ‘권태’라는 통일된 관심사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간혹 철학적으로 그리고 자주 사회학적으로 이를 살피고 있다. 공통적으로 ‘권태’라는 개념의 발현 시기를 근대 직전으로 보고 있으며,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 양태가 이러한 ‘권태’를 보다 고도화 그리고 정밀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지루함, 게으름, 따분함 등 ‘권태’라는 현대적 증상과 교차점을 이루는 다양한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비교와 대비가 나름 설득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생기는 감정이 따분함이라면 사람들에 둘러싸여 분주한 가운데 찾아오는 텅 빈 것 같은 진공상태가 권태다... 권태의 감정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중간 감정이다. 분주하게 일을 하는 듯 보이지만 한가하며, 즐거운 듯 보이지만 지겹고 따분해 하는 감정이다...” (pp.74~75) - 김종갑 <근대의 증상으로서의 지루함> 중
이러한 책의 앞부분에 실린 두 편의 글들이 ‘권태’라는 단어를 개념적으로 정리를 하는데 치중하고 있다면 이후에 실린 김운하의 글은 이러한 ‘권태’가 현대 사회의 ‘재미’라는 속성을 통해 더 부각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권태’를 다루고 있지만 오히려 우리는 ‘권태’의 반대편에 있는 ‘재미’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권태의 ‘결핍된 상황’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결론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 현대인은 점점 더 외부지향적인 존재로 변하고 있다. 외부 세계의 자극이 주는 쾌락과 재미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인터넷과 스마트폰, 태블릿PC, 구글 아이 같은 첨단 미디어 기계 장치들이다. 인간의 영혼은 그러한 외부지향성 속에서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영혼의 세계, 내면의 세계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에는 재미가 과잉이고 결핍된 것은 다름 아닌 권태, 내면적 권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과잉 발달은 재미중독이라는 증상 속에서 인간을 사라지게 만든다.” (p.93) - 김운하 <우리는 왜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가> 중
이후 조선시대 성현들의 글을 통하여 당시의 삶과 연관지어 ‘권태’를 살피는 황혜진의 글을 넘어서면 각론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권태와 여성, 권태와 폭력, 권태와 대중문화를 비교하며 서로에 대해 상호 작용을 하는 이들 개념을 실례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물론 모든 내용에 동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비교 자체가 현대 사회의 여러 징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 현대인들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해소하고 있는 권태는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구분한 개념에서 볼 때 ‘표면적 권태’에 지나지 않는다. 표면적 권태와 달리 ‘깊은 권태’는 섣불리 해소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깊은 권태는 오직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야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태의 망각은 즐거움의 중독으로 이어지며 악순환을 이루기 때문에 권태를 정면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창조적 열정으로 바꾸는 지혜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pp.177~178) 손석춘의 <권태 죽이기와 죽도록 즐기기> 중
마지막 손석춘의 글은 우리가 ‘권태’에 대해 갖는 표피적인 인상에 치우치지 말고, 우리들 각자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그러니까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권태’와는 다른 ‘권태’와 정면으로 마주설 수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책에서 다루는 ‘권태’의 여러 미성숙해 보이는 양상은 현대적 의미의 ‘권태’가 아직 어려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책의 필자들부터 지금의 어린 ‘권태’ 다루기에서 멈추지 않고 좀더 나아간다면, 독자인 우리들의 권태를 ‘지혜’로 바꾸는 여정이 수월해질 수 있지 않을까...
몸문화연구소 엮음 (이성민, 이종주, 김종갑, 김운하, 황혜진, 최하영, 황은주, 송치만, 손석춘) / 권태 - 지루함의 아나토미 / 자음과모음 / 178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