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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공간과 시간 양쪽의 측면에서 확장되는 시인의 착한 감성...

by 우주에부는바람

작가의 시가 마음에 들어서 내친김에 산문집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시인이면서 소설도 여러 권 쓴 전력을 지닌 작가는 책이 나올 당시인 2003년, 독일의 뮌스터 대학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책은 그곳에서 작가가 보고 듣고 느낀 짧은 심상 백서른아홉 개 그리고 조금은 긴 편지글 아홉 개로 이루어져 있다.


『태양 아래 그 노새는 서 있었다.

우리가 발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것은 대개 정오 무렵. 노천의 해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목화밭 가장자리에 끝도 없이 열을 지어 서 있던 해바라기도 축축 처지는데, 녀석은 고개를 떨구고 앞발로 흙만 툭툭 차고 있었다. 그 녀석이 서 있던 자리 근처에는 작은 쓰레기장이 있었는데 검은 비닐 포장지가 지천으로 뒹굴고 있었다. 가만 들여다보니 녀석은 검정 비닐 조각을 우물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눈에는 테가 잔뜩 낀데다 꼬랑지는 축 처져 있고 다리 넷은 말라빠져서 이놈이 과연 지푸라기 하나라도 나를까, 싶었다. 다음날 우리는 마른 빵을 가지고 있다가 녀석을 보면 던져주곤 했다. 빵을 허겁지겁 먹는 녀석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알량한 선량함에 감동하면서 시시덕거렸는데…… 그 녀석은 마침내 우리를 태우고 지나가는 차를 향해 달려오다가 치이고 말았다. 다리를 다치고는 태양 아래 널브러져 피를 흘렸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 녀석이 장님이라는 것을.』<노새 이야기> (p.29)


딱히 시인이 쓰고 있다고 생각되는 현란한 문장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감성만큼은 시인의 것이구나 실감할 수 있는 내용들을 특징으로 하는 글들이 실려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고고학의 특성 상 작가는 중동의 지역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는 하는데, 그곳에서 작가는 옛날 유적만을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간간히 작가를 작가도록 하는 시선으로 여러 글 또한 발굴해내는 것이다.


『어느 미학자의 책표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딸과 아버지의 대화.

“아버지들은 자식들보다 아는 것이 더 많나요?”

“그럼, 그들은 인생을 더 많이 살았으니까.”

“그런데 왜 증기기관은 와트의 아버지가 아니고 와트가 발명했어요?”』 <증기기관을 와트의 아버지가 아니라 와트가 발명한 까닭> (p.31)


보기와 달리 시인은 위트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위와 같은 글을 싣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또한 자신이 나이 들어가고 있는 것에 크게 연연해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하긴 적지 않은 나이의 국문학과 출신 시인이 고고학을 하겠다고 독일로 떠난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기는 있다. 그러니 실린 여러 글들은 둔중하게 가슴을 때리기도 하고, 살금살금 마음을 간질이기도 하는 것이다.


『비행기 추락사고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컴컴해진다. 첫째, 나는 비행기를 타본 적이 있고, 둘째, 내 노모는 아직 살아 계시다. 공중에서 갑자기 그리고 무참하게 폭발할 수도 있는 삶의 조건을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삶의 조건을 넓히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조건을 넓히는 일은 죽음의 조건을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날틀> (p.75)


물론 시인(이자 소설가이지만 어찌되었든 나에게는 시인이로 각인된)인 작가가 보여주는 삶을 향한 지긋한 시선 또한 여러 곳에서 감지할 수 있다. 삶의 지평이 곧 죽음의 지평이기도 한 우리네 인생살이가 시인의 산문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정년을 앞둔 여인이 ‘되돌아보면 아무 일도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시인이 들을 때 우리 또한 제 인생을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 나에게는 암사자가 산양 새끼를 거두어들이는 이 장면이 아름답기만 하다. 무엇인가 자연계에 발생을 했다.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감히 점치지 못하는 어떤 일이…….” (p.215)


책을 읽고 나니 시인의 글 뿐만 아니라 시인의 삶이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방향 선회의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 꽤 다른 각도로 비틀 수 있는 시인의 어떤 지점이 궁금해진 것이다. 어찌되었든 세상을 통찰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다양하게 보는 것에서 비롯될 것이니, 이 시인이 자신의 시선을 공간 그리고 시간 양쪽의 측면에서 넓혔다는 사실, 이번에는 궁금함이 아니라 부러움이다.



허수경 /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 문학동네 / 252쪽 / 200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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