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뜩이는 소설적 상상력에 허용되었던 너무 야박한 시간...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듯이 한 세계를 내 맘대로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그런 재미난 놀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낯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 머물 수 있다. 그들이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또다시 낯선 인물들로 가득한 세계를 찾아 방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작가의 말 중
번뜩이는 소설적 상상력이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상력을 너무 자그맣게 소품처럼 활용한 듯하여 아쉽다. 좀더 치밀하고 깊고 날카롭고 끝까지 밀고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작가가 소설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밝힌 소설론에 빗대어 보자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작가에게 너무 짧은 시간만을 허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하여 자신이 이 소설을 좀더 밀고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게 된다.
“...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다.” (pp.8~9)
소설은 25년 전 혹은 26년 전에 마지막 살인을 하고,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라는 희망이 사라진 뒤 살인을 멈춘 연쇄 살인범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제 노인이 된 이 연쇄 살인범은 치매에 걸렸다. 그러니까 가까운 기억들부터 점차 잃어가고 있다. (비슷한 설정을 크리미널 마인드이던가 CSI이던가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독자로서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설정이 아닌가...
“내 인생은 셋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를 죽이기 전까지의 유년. 살인자로 살아온 청년기와 장년기. 살인 없이 살아온 평온한 삶. 은희는 내 인생 제3기를 상징하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부적 같은 것 아니었을까. 아침에 눈을 떠 은희를 볼 수 있다면, 나는 희생자를 찾아 헤매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었다.” (p.54)
이렇게 삶을 마무리해가는 연쇄 살인범의 황혼은 그러나 치매와 함께 주변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연쇄 살인, 그리고 주인공이 연쇄 살인범이라고 확신하는 인물이 그의 딸인 은희에게 접근하면서 이야기에 변곡이 생긴다. 이제 그는 사라져가는 자신의 기억과 싸움과 동시에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한 연쇄 살인범과의 싸움을 치러내야만 한다. 여기에 그가 저지른 수십년 전의 사건을 이야기하며 접근하는 안형사 또한 이 남자를 성가시게 만든다.
“은희 엄마가 내 마지막 제물이었다. 그녀를 땅에 묻고 돌아오던 길에 차가 나무를 들이받고 전복됐다... 병실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한없이 평안하여 기이했다... 갑자기 귀가 멀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마음에 찾아온 이 돌연한 정적과 평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p.22)
그리고 이러한 여러 소설적 사건들, 이 남자의 기억과 현실들은, 이 남자의 기록을 통하여 구성되거나 재구성된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독자인 우리들은 소설을 믿을 수가 없다. 소설 안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을 의심하고, 소설 바깥에서는 독자들이 주인공을 비롯한 소설의 내부를 의심하는 형국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대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지금까지 독자인 우리가 따라 다녔던 인물들과 사건들은 흩어지고 사라지면서 원점으로 되돌려진다.
“...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p.129)
소설은 반야심경과 금강경에 대한 인용 등을 비롯해 무위의 세계를 다루는 불교적 세계관, 그리고 오이디푸스를 통한 한 인간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극대화시키는 신화적 세계관을 적당히 중첩시킨다. 하지만 어딘지 맥이 빠진다. 모든 것은 그렇게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이고, 당신이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하여 보고 들은 것 또한 그렇게 스러져간 것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하긴 결국 소설 바깥의 우리들 또한 그러한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기는 하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pp.148~149)
김영하 / 살인자의 기억법 / 문학동네 / 173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