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설정이 무겁기 그지없다. 제목에서 받게 되는 발랄함이 있어 그 언밸런스가 가혹하다. 게다가 원래부터 작가의 묘사가 이리 약했나 싶게 종종 우격다짐 같은 혹은 살랑거려 간지러운 문장들이 눈에 띈다. 연일 최승자의 시를 읽어서 그런 것인가 갸우뚱 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소설을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무겁고도 유치하고 애매하면서도 평면적인 소설을 읽으면 으레히 그렇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두 마디만 잘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고.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규칙은 있다. 한 번에 하나씩. 설탕과 소금은 같이 넣지 않는 법. 사내는 늘 궁금했다. ‘고맙습니다’는 설탕일까, 소금일까.” (p.22)
소설의 주인공은 사내다. 소설의 서두에서 그는 어머니를 잃는다. 동시에 어머니가 맡아서 기르고 있던 자폐아인 아들과 함께 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는 동생을 잃었고 아버지를 잃었으며 아내를 잃었고 이제 어머니까지 잃었다. 그 시작점에 동생이 있고, 그 마지막에는 아들만이 남았다. 그는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동생에 대하여 강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들과의 여정은 그 부채의식을 털어내기 위한 여정이다.
“야구는 아이가 좋아하는 유일한 스포츠다. 아이와 야구장에 가본 적은 없다... 사내 역시 아버지와 야구장에 가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야구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속에만 존재했다. 아버지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담가둔 자신만이 야구를, 자신만의 타이거즈를 매일매일 소주잔에 부어 홀짝였다. 승리도 패배도 소주잔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p.61)
잠시 야구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사실 이 소설의 심연에는 팔십년 오월 광주가 있다. 그러니 소설은 무겁다. 소설 속에서 야구가 각별한 이유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광주를 겪은 이들에게 타이거즈는 그저 단순한 야구팀의 이름이 아니다. 그들의 혼백이 담긴 이름이다. 그래서 염소로 지칭되는 폭력에 동생을 잃은 사내와 그 아버지는 야구를 본다. 하지만 끝까지 보지 못한다. 8회까지만 본다. 그들에게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그들은 그 승부를 끝까지 볼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 빨간 침대 끝에서 땅콩사탕은 등을 돌린 채 브래지어를 잠그며 말했다. 괜찮아. 사내의 눈에서 축축한 게 흘렀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괜찮아. 동생이 빨갱이로 죽었지만 괜찮아. 아버지가 맛이 갔지만 괜찮아. 내일이면 입영열차에 타야 하지만 괜찮아. 타이거즈의 첫 우승 순간을 놓쳤지만 괜찮아. 괜찮아. 아버지는 한 번도 해주지 않은 말...” (p.125)
오월, 사내보다 모든 면에서 잘났던 동생이 죽었다. ‘주사위를 던져서 홀수면 빨갱이고 짝수면 아니야. 누가 먼저 할래?’ 염소가 말했고, 동생은 던진 주사위를 입으로 받아서 먹어 버렸다. 동생은 죽었고 이제 사내는 그 염소를 찾아다니고 있다. 자신이 죽고 동생이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저 이제라도 염소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생각뿐이다.
소설은 이 불우한 사내를 계속해서 따라다닌다. 사내를 따라다니는 소설을, 따라다니다 보면 독자는 금세 지치고 만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가 명확한 불우함인데 그 해소가 온전치 못하니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개운치 않다. 소설은 느리기만 한데 왜 자꾸 작가가 서두르고 있다고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아마 작가도 소설을 쓰는 어느 시점에선가 실투를 느꼈을지 모른다. 때로는 지는 게임을 책임져야 하는 선수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