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고삐 놓쳐 숫사슴의 뿔처럼 솟구치는 아우성 달래며 어슴푸레...
「파종」.
자동차 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은 딸, 생의 절정을 지나 이제 집에서 소일하는 아버지... 이 두 사람이 이제 또 다른 딸의 병간호와 살림 도우미를 위해 도쿄에 머물게 된다. “... 오백칠십 그램의 미숙아로 태어나 평생 몸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안해본 게 없는 사람이었지요. 원대한 꿈을 가진 적도 있었을 거예요. 지금은 엇비슷한 것 하나 이루지 못했지만, 한때는 나에게 햇빛도 막아주고 바람도 막아준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로 한날한시에 죽은 남편과 아이를 화장하고 산을 걸어내려오던 날이었어요.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한 말은 이랬습니다. 참 잘 끝났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요. 어쩐지 셋이 같이 있다 혼자만 살아남은 나를 비난하는 말처럼 들려 들고 있던 막대기로 나 자신을 푹 찌르고 싶어지더군요. 그 말이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것에서 어린아이를 묻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곤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시간이 지난 후였지요.” (p.28) 시간은 지나고 생은 파리해져 가지만 또 다른 생은 또 푸르러가는... 우리네 인생의 어떤 반복 혹은 전진...
「학습의 生」.
오랜 교직 생활 끝에 이제 남편과도 떨어져 시골 한적한 집에 둥지를 틀게 된 나... 그 집을 찾아오는 투포환을 하고 싶어하는 소년 무순... 마당에 원을 그리고 그곳에서 회전하며 투푸환의 공을 날리는 소년과 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독려하는 나 사이에 어떤 암전 같은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봉천동의 유령」.
“... 한가지 더 명확하게 알아차린 것은 이제 나의 서정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이었다. 서정적 시기라는 것이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젊은 시기이거나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통찰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라면 말이다... 서정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그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혹은 어둠 너머의 것을 주시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p.101) ‘어둠 너머의 것’을 주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어떤 한 시절을 되돌이켜 보는 일종의 서정적 자서가 그로부터 비롯될 수 있을까.
「단념」.
오십이 넘은 여자, 그 여자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청년, 그 청년이 나갔다가 다시 함께 들어온 여자 아이... 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카바이트 불빛마냥 비릿하게 켜졌던 불, 그 불을 따라 불나방처럼 그녀의 생에 훌쩍 끼어든 어린 청년과 소녀의 이야기이다. 어떤 단념의 순간 불현 듯 볼 밝히게 되는 뜻하지 않는 생의 정념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일까.
「일요일의 철학」.
외국의 한 도시... 그곳에서 알게 된 술집과 그곳의 바텐더... 그리고 그 바텐더의 어린 딸과 함께 보내게 된 시간... “... 눈앞에 내리막길이 가늘고 긴 소실점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 추락하고 있는 것일까? 다리를 뒤로 더 쭉 뻗으며 반문했다. 이것이 나의 속도일까? 허리는 더 낮게, 눈은 더 먼 데로 던졌다. 열기를 잃어가는 오후의 주홍빛 태양이 긴 줄무늬를 이루며 하늘에 번져 있었다. 나는 눈부셔하면서, 누가 등 뒤를 세게 한 번 밀어준 것처럼 미끄러지듯 나갔다...” (p.165)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서간체 혹은 이러한 경어체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작가의 흐릿하고 어슴푸레한 문체가 명쾌하게 드러나는 작품인 것 같아서 소설집에 실린 것들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일본으로부터 남자를 따라 한국에 온 여인, 그리고 그 남자가 죽은 후 오또오상 그러니까 시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된 여인, 그 여인이 바로 그 오또오상에게 보내는 일종의 가슴 깊은 편지...
「옥수수빵 구워줄까」.
작가가 첫 번째 문학상을 탄 소설도 그렇고 이후의 작품들도 그렇고 음식 혹은 음식의 맛이나 색이나 음식의 재료에 치중하는 편이다. 이번 소설에서는 한 발 나아가 음식을 만드는 도구인 오븐에게까지 천착한다.
「성냥의 시대」.
성냥을 만드는 공장, 그러니까 쇠락해가는 과거, 그러면서 나의 아버지로까지 이어지는 어떤 연대... ‘좋은 불은 뜨겁고 나쁜 불은 차갑다’ 말씀하시는 아버지에게 ‘세상에, 차가운 불이 어디 있어요’라고 대꾸하였던 나는 어떻게 연대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기억과 기억 속의 사람은 이 땅의 사소한 모든 것들로부터 비롯됨을 작가는 알고 있다.
조경란 / 일요일의 철학 / 창비 / 273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