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 《잽》

툭툭, 작가가 던지는 잽 풍의 이야기들에 조금씩 무너져가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이게 잽이라는 거다. 어깨와 주먹에 힘을 빼고, 툭툭, 주먹으로 치는 게 아니라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빨리 꺼내온다는 느낌으로 팔을 뻗는 거야. 툭툭, 스텝을 밟으면서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툭툭, 발의 움직임에 따라 몸에 리듬을 타면서, 툭툭, 상대가 짜증이 나도록, 상대가 초조해지도록, 상대의 얼굴에서 서서히 분노가 차오르도록 톡톡, 계속해서 날리는 거야. 그럼 알아서 무너져. 잽으로 다 무너뜨린 다음 한 방에 보내는 거지. 해봐.” (p.25)


박민규 만큼이나 재기발랄한 작가가 보여주는 단편 소설의 상상력이 좋다.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을 버티기에 아주 적당하다. 툭툭, 작가의 상상력이 베개에 파묻고 있는 머리에 잽을 날린다. 툭툭, 물론 이 작가가 날리는 잽에 분노 대신 작은 웃음이 차오른다. 툭툭,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작가의 한 방에 무릎을 꿇는다. 툭툭, 계속해서 날리는 잽에 무장 해제 되어가던 마음에 푹 꽂히는 한 방, 그러한 한 방이 있는 작가이다.


「잽」.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못 되면요?”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 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 (pp.25~26)

창밖의 회오리바람을 보다가 내뱉은 감탄사로 인해 나는 실리카겔 선생에게 무참히 뺨을 얻어 맞고, 그러다가 소리를 지르고, 반성문 작성을 거부하고, 그 날부터 졸업 때까지 학교 테니스장과 그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권투 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권투 그리고 나에게 권투를 사사한 관장의 잽 예찬론이 나를 만들었다. 실리카겔 선생과 나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의 해후가 마음에 든다. 잽 그리고 홀딩... 인생을 살아가는 아주 유효한 기술이다.


「금고에 갇히다」.

어찌 보면 김언수다운 상상력이다. 두 친구 그리고 한 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금고털이들은 그만 금고에 갇히고 만다. 그 와중에 나는 그 한 명의 여자에 대한 음심이 생겨 고생을 하고, 결국 뱀 놀이를 통하여 둘 중의 한 명이 이 여자와 자기로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얼렁뚱땅 진행되는 소설이 작가의 장기가 될 수도 있을까. 어디에서 읽었나 했더니 2011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던 작품이다.


「단발장 스트리트」.

장발장 대신 단발장이라고 불리우던 뒷골목 이야기... 웨이터로 살아가는 나와 몸 파는 아가씨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애인의 이야기인가 싶다가 어느 날 잭과 두꺼비가 맞붙는다. 동전을 던져 서로의 손가락을 자르는 내기를 하는 두 사람의 살벌함이 생생하다. 이 게임에서의 승자는 잭이었지만 재은 다음 날 칼에 찔린 채 발견된다. 아수라장의 공간인 그곳 단발장 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 “그럼 뭐가 사랑인데, 같이 살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씹하면 사랑하는 거지. 뭐가 더 필요해, 이 쌍년아!” (p.90) - 진창 같은 사랑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이다.


「꽃을 말리는 건, 우리가 하찮아졌기 때문이다」.

“... 제이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난간에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 다음 있는 힘껏 다려 양화대교 난간을 손으로 짚고 허공으로 경쾌하게 날아올랐다. 마치 체육 수업시간에 호각 소리에 맞춰 뜀틀을 넘는 아이처럼 그토록 경쾌하게. 제이는 마치 정지해 있는 새처럼 공중에 잠시 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강으로 떨어졌다.” (p.98)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던 제이를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누군가와 잠을 잤고 그래서 매일 누군가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잠을 자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온 그녀와 술을 마셨고 잠을 잤다. 다음 날 함께 아침을 먹자고 재촉하는 그녀를 따라 양화대교를 건너는 중간, 그녀는 그곳에서 난간을 뛰어 넘었다.

“꽃을 말리는 것은 우리가 하찮아졌기 때문이라고 시인 성윤석은 말했다. 아마도 90년대 초반의 학번을 가지고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이 말이 자기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드라이플라워 같은 시절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하찮아진 세계를, 또한 그래서 갑자기 하찮아진 대학을, 아니라면 ‘처음부터 우리는 하찮았던 것 아닌가?’하고 자문하던 자신들의 세대를 또렷이 느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우리는 앞 세대 선배들처럼 전사적이지도 못했고 후배들처럼 세련되지도 못했다. 마치 꽃샘추위처럼, 봄옷을 입기에는 너무 이르고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기에는 이제 지겨운, 애매한 시절에 태어난 세대라고나 할까.” (p.103)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

“... 나는 자료를 해석하고 거기에 살을 붙이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사건을 조리에 맞게 결합했다. 나는 날마다 진술서의 세계가 점점 좋아졌다. 아무런 의혹도 모순도 없는 세계! 이처럼 논리적이고 명확한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더이상 나에게 암살범이라는 가짜 암시를 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암살범 그 자체이고, 진술서 그 자체였다. 나는 이제 자료만 준다면 어떤 진술서도 열두 시간 안에 완벽하게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p.143)

어느 날 검은 양복에게 끌려간 나는 거기서 만난 카키색 양복의 사내에게 무참한 고문을 당함과 동시에 진술서 작성을 요구 받는다. 잠시 반항도 해봤던 나는 결국 그들이 시키는대로 진술서를 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그 진술서 쓰기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진다.


「장지구의 결단」.

꽁트에 가깝다. 사미도 교수의 새 시집 『변기통 속의 똥 덩어리들은 어떤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세미나의 발제자가 된 장지구는 내내 작성을 못하다가 그 원인을 자신이 아직 섹스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결국 ‘띄엄띄엄 삵 운동본부’의 모임에 참석하여 그곳에서 왠지 잠을 자줄 것 같은 여인 야쿠르트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장지구의 파트너는 여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는 가순지로 바뀌어 버린다, 는...


「소파 이야기」.

“... 태양이 정수리 위에 수직으로 섰다가 옆으로 천천히 기울어질 때까지, 주전자에 있는 커피를 모두 다 마시고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나는 테라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득 지구가 점점 온난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점점 더 외로워지기 때문일 거라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했다. 점점 더 외롭고, 점점 더 외로워지기 때문에 모두들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p.201)

모두들 외로운 것일까... 어느 새벽 명동에서만 사는, 명동에서만 일을 하고 명동에서만 사람을 만나고 명동에서만 섹스를 하는 친구로부터 나는 연락을 받는다. 자신이 가지고 올라온 소파를 함께 치워달라는 부탁...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차를 몰고 그의 집에 도착하여 소파를 치우고 함께 잔다, 아니 친구는 자고 나는 잠들지 못한다.


「빌어먹을 알부민」.

간이 망가진 아버지를 건사하고 있는 동생으로부터 알부민을 싸게 구할 수 있는 루트가 있으니 삼백만원만 만들어달라는 전언...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내게 아내는 그 돈을 보내면 끝이라고 말하고, 아들을 영어 캠프에 보낼 돈은 있으면서 아버지에게 보낼 돈은 없는 아내에게 분개하여, 은행에서 그 돈을 덜컥 출금해버리다. 하지만 그 수표를 들고 그가 만난 것은 직장 생활 당시 그와 섹스 파트너를 하던 송이다. 그는 그녀와의 섹스를 갈구하며 1인분에 12만원짜리 바닷가재를 사고, 18만원짜리 와인을 사고, 호텔은 찾지 못하였지만 여관에 입성한다. 하지만...


「하구(河口)」.

하구,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귀... 어느 날 갑자기 마시기 시작한 술로 알콜중독자가 되고, 병원에 들락거리면서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결국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고, 그렇게 흘러가게 된 어느 하구에서 나는 허대와 그의 코끼리를 닮았다는 아내를 만나게 된다. 그 하룻동안의 만남의 이야기인데, 어쩐지 이제 소설 속의 나는 정신을 차리게 될 것만 같다. 그런 정신차림의 기대감을 주는 소설이다.



김언수 / 잽 / 문학동네 / 278쪽 / 20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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