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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올빼미》

가뿐히 너덜너덜한 육신을 내려 놓고 보이지 않는 밤을 배회하게 되는...

by 우주에부는바람

기이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거대한 배의 난간을 붙잡은 채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향하여 소리치며 버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침몰하였고, 다시는 떠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작가는 나의 육신이 아니라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자였으며, 나는 그곳에 너덜너덜해진 육신은 내버려두고 별다른 자맥질 없이도 다시 떠올랐다. 내가 가라앉을 때 품고 있던 두려움이라는 납덩이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어떤 초연함이 나를 해수면으로 쏘아 올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하니 기이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 어떤 일들에 관련해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여기에 적어 내려갈 것이다... 나의 유일한 두려움은 나 자신을 알지도 못한 채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나는 나와 타인들 사이에 가로놓인 두려운 심연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침묵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가능한 한 오래 나의 속마음을 남에게 발설하지 않는 것임을. 이제 만일 내가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다면, 그것은 단지 내 그림자에게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그 그림자는 내가 쓰는 모든 단어들을 걸신들린 듯 먹어치울 자세로 벽에 드리워져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은 오로지 그 그림자를 위해서이다. 누가 아는가?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될지. 인간들과 연결되어 있던 마지막 유대의 끈을 끊어 버린 이후, 나에게 남은 단 하나의 욕망은 나 자신을 더 잘 아는 일이었다.” (pp.18~19)


이란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길지 않은 소설은 놀랍게도 지배적이다. 그는 독자의 의식을 지배하려는 자이며 스스로 불타는 우주를 지니고 있는 듯한 작가이다. 하지만 그는 그 우주의 불길을 자신의 내부를 향하여 뿜어댄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마치 그 불길을 이기지 못하여 분출된 용암과도 같고, 혹은 강한 폭발 뒤에 차갑게 식어버린 딱딱한 용암과도 같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가의 자의식이 베수비오 화산 아래 폼페이 사람들처럼 고스란히 어떤 순간인 채로, 그렇게 죽었으나 산 채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나의 생각들과 실체가 없는 자아인 나의 그림자 사이에 하나의 연결 통로를 만들려는 욕구이다. 그 강한 욕구,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절박한 지금의 그 마음 때문이다. 그 불길한 그림자는 지금 등잔의 불빛 속에서 벽에 드리워져서 내가 쓰는 각각의 단어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자세를 하고 있다. 이 그림자는 분명 나보다 더 잘 이해한다. 내가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상대는 그 그림자 뿐이다. 나로 하여금 말하게 만드는 것은 그 그림자이다. 그만이 나를 알 수 있다. 그는 분명 나를 이해한다...” (pp.72~73)


소설을 읽는 순간 느끼게 되는 어떤 참담함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정체를 규명하기 힘들다. 명명할 수 없는 아득함으로 가득하다. 작가의 세계와 소설 속 나의 세계, 소설 속 나의 세계와 독자인 나의 세계, 독자인 나의 세계와 작가의 세계가 마구 뒤섞인다. 꼬인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소설을 쓰는 작가, 그림을 그리거나 매음하는 아내를 사랑하는 소설 속의 나, 책을 읽는 나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없다.


“... 벽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는 실제의 내 몸보다 한결 짙고 뚜렷했다. 내 그림자는 나 자신보다 훨씬 실제적이었다. 잡동사니 파는 노인, 푸줏간 주인, 유모, 내 아내인 그 매음녀는 나의 그림자들이었다. 주위를 에워싸 나를 가두고 있는 그림자. 이때 나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 한 마리 올빼미가 되었지만, 비명이 목구멍에 걸렸다. 나는 핏덩이의 형태로 비명을 쏟아냈다. 어쩌면 올빼미들도 나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벽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는 올빼미와 똑같아져서, 몸을 굽혀 내가 쓴 글을 하나하나 집중해서 읽었다. 올빼미가 내 글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직 올빼미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벽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를 곁눈질하면 두려움을 느꼈다.” (p.158)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눈먼 올빼미는 보이지 않을 때 보는 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소설 속에서 거론되는 그림자는 실재하지 않는 실제이다. 소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것을 두 개의 이야기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야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이야기로 읽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아니 아편에 취한 주인공처럼 그저 현실과 환상 혹은 허상 사이를 부유하듯 읽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을 망각의 잠에 내맡기고 싶은 욕망이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왔다. 단지 망각에 도달할 수 있다면, 만일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만 있다면, 감은 내 눈이 잠을 초월해 무로 화할 수 있다면, 그래서 앞으로 언제까지나 내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만일 내 존재가 한 방울의 잉크 속에서, 한 소절의 음악 속에서, 한 줄기의 색깔 있는 빛 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리하여 이 파도들과 형태들이 점점 커져 무한대의 크기가 되어서 마침내는 희미해져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바람도 이루어지리라.” (p.64)


그렇지 않으면 소설 전체에 짙게 깔려 있는 인간 영혼의 어두운 맥락으로 휩쓸려 갈 위험성이 크다. 독자인 나는 혹시 내가 이미 읽은 곳을 또 읽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종잇장이 스르르 넘어가 이미 읽은 페이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리둥절해 하고는 한다. 작가는 반복하며 탈피(脫皮)한다. 한 번 거쳐 갔던 곳을 다시 걷게 되지만 그곳은 내가 이미 걸었던 그곳과 닮아 있을 뿐 같지 않다. 다시 들른 그곳은 경전이 되어 있고 순례의 길이 되어 있다.


“삶은 지속되는 과정에서, 인간 각자가 쓰고 있는 가면 뒤에 있는 것을 냉정하고 공정하게 드러낸다. 누구나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의 얼굴만 쓰고, 그러면 자연히 더러워지고 주름이 생긴다... 다른 사람들은 자손들에게 물려주려는 소망에서 자신의 가면들을 보살핀다. 또 어떤 이들은 끊임없이 얼굴을 바꾼다. 하지만 그들 모두 늙음에 이르면, 어느 날인가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마지막 가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곧 그것이 너덜너덜해지고, 그러면 그 마지막 가면 뒤에서 진짜 얼굴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p.134)


영역본 2010년판에 실린 이란 작가 포로키스타 카크푸르는 서문을 통해 이 소설의 특징으로 ‘애매한 상징성’, ‘나선형으로 꼬인 암호화’, ‘왜곡된 심리적 풍경’, ‘세속적이지 않은 주제’를 꼽았다. 일단 동의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는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우리 내부의 숨겨진 불안감을 들춰내고, 우리 삶의 피로감을 직시토록 하며, 발견되지 않은 독자 자신을 비춰준다.


“... 두려운 것은 이것이었다. 내 몸을 이루고 있던 원소들이 나중에 속물들의 몸을 구성한다는 것. 이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은 다음에 길고 감각적인 손가락을 가진 커다란 손이 나에게 주어지기를 소망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주의 깊게 내 육체의 원소들을 그러모아서 손에 꼭 쥐고 싶었다. 그것들이, 나의 것이었던 것들이 속물들의 육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p.130)


소설 속의 나는 말한다. ‘밤이 발끝으로 걸어 사라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밤은 충분히 피로를 쏟아 냈으므로 저의 길을 갈 자격이 있었다’ 라고... 그렇지만 독자인 내게는 ‘황량한 빈 집’ 같은 세계를 살아내는 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삶을 향하여 스스로 위증의 죄를 실토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단어와 문장 마다 실려 있는 어떤 힘이 판사의 망치처럼 내 뒤를 따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사데크 헤다야트 / 공경희 역 / 눈먼 올빼미 (The Blind Owl) / 연금술사 / 195쪽 / 201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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