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관계들의 물렁함과 뻔하지 않은 스캔들의 물컹함...
연애소설 따위 읽지 않을 테야, 라고 매번 다짐하지만 곧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번잡스러운 마음을 잠시 한 켠으로 밀어두는 방법으로서 연애소설 따위를 읽는 일은 얼마나 유효하냔 말이다. 잡아 먹을 것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리얼하지 않은 존재와 끊임없이 다투는 혼란스러운 마음도, 끝나지 않는 질투는 폭력에 불과한 것이야 라며 허겁지겁 자책하는 자학의 마음도 잠시 자리를 비운다.
“그게 어떤 것이든,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요... 장소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나에게는 세상 모든 일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에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 실제로 나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 이미 흥미를 잃었다. 나는 벌써 그를 통과해버린 것이다...” (p.55)
어느 해변의 관광지에서 슈코는 미우미라는 소녀에게서 엉뚱하게도, 자신의 아버지와 연애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는다. 자신의 남편 하라를 열렬히 사랑하는 슈코는 오히려 소녀에게 관심을 보내지만, 결국 미우미의 아버지와 해변에서의 짧은 정사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준 미우미가 갖는 그 잔망스러운 특성이 오히려 슈코에게는 더더욱 기억에 남을런 지도 모른다.
“... 난 와타루에게 그런 걸 물어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묻지 못할 것이다. 물어도 어차피 얼버무릴 게 뻔하고, 묻는 순간 뭔가가 무너져버리는 기분이 들 것이다. 와타루의 특별 대우를, 간결하고 애매한 지금의 관계를 나는 잃고 싶지 않다. 설령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 유지할 수 없는 것 - 마치 장미에 맺힌 물방울처럼 - 이라 해도.” (p.129)
관광지에서의 이들의 인연은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이어진다. 소녀 미우미는 슈코가 일 하는 공간이자, 슈코의 엄마 기리코가 살고 있는 건물에 수시로 드나들기 시작한다. 간간히 이 성장통을 겪는 소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너가 되어 일하고 있는 청년 와타루에게 연정을 내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와타루는 소녀의 잔망스러운 대사와 행동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남편을 알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다. 애인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훨씬 즐거웠다. 그때마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상대에게 연애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애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내 시간과 육체, 거짓 없는 말, 그리고 호의와 경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지만, 그 다싯 가지를 받고 만족하지 않은 남성은 없었다.” (pp.160~161)
(스포일러 주의, 책을 사서 보실 요량이라면, 여기서 읽기는 멈추는 것이...) 그렇게 슈코와 하라 부부, 그리고 미우미와 와타루 사이의 사랑에 대한 어떤 말랑말랑한 관념의 소설이라고 여겨지는 찰나, 그러나 소설은 전혀 엉뚱하게도 물컹물컹한 방향으로 갈피를 잡는다. 그러니까 슈코와 기리코씨를 방문하던 소녀 미우미가 은근슬쩍 슈코의 남편인 하라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미우미와 하라씨는 러브 호텔의 한 방안에 나란히 눕는다는 뭐 그런...
“... 나는 남편에게 지배당하고 싶어 못 견디면서 동시에 그 이전의 나를 고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는 바로 그때의 나이기 때문이다.” (p.187)
뜯어먹을만한 영혼의 살집 같은 것은 딱히 없는 소설이다. 일본 여류 작가들 특유의 말장난에 익숙하지 않다면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미 익숙해진 후라면 그 또한 심드렁할 것이다. 그나마 소녀 미우미의 캐릭터가 살짝 긴장감을 주기는 한데, 호텔에 훌쩍 들어가는 순간 이 또한 김이 샜다고나 할까. 그저 설득하거나 강요할 생각 없는 이 멀쩡하지 않은 관계들의 관계들을 들여다보며 달아오른 머리나 식히는 수밖에...
에쿠니 가오리 / 신유희 역 / 잡동사니 (がらくた) / 소담출판사 / 311쪽 / 2013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