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요시모토 바나나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그저 허접한 사랑 이야기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by 우주에부는바람

사람의 정이라는 것은 참 무섭기도 하다. 온통 사라진 줄 알았던 저기 서랍 맨 아랫자락의 오래된 편지라도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붉어지기도 하고, 사색하다가 사색이 되어버릴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추억을 복기하며 정념에 가득 찬 새벽을 보내기도 한다. 끊임없이 자기를 복제할 뿐인 요시모토 바나나를 여태 읽는 것도 그 놈의 정 때문이리라. 오래 전 이 작가를 읽어낼 때의 마음 한 자락이 스르르 소리도 없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은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치 비행기가 추락하기 직전에 급히 유서를 쓰는 사람처럼 수첩을 북 뜯어 휘리릭 편지를 쓰고는 그 집 우편함에 넣었다... 애처로운 마음의 편린.” (p.10)

언제나처럼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그 속의 사랑에 커다란 열정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만큼 어슴푸레 실루엣으로 흘러 다닌다. 어린 테트라가 갑자기 집을 옮기며 그만큼이나 어린 다마히코에게 이별의 전언을 보낼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어진다. 그렇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에게 그것은 여지없이 또 하나의 사랑의 시작이 된다.

“기대하면 하는 만큼, 슬픔도 깊어진다... 만날 때마다 하나, 또 하나 품고 있던 희망을 지워 가는 그 느낌은 얼룩처럼 마음에 남아 있었다. 더구나 무의식적으로 전기 스위치를 끄는 것이 아니라, 촛불을 하나 하나 불어 끄는 것처럼, 보다 의식적으로 지워 나가는 느낌이었다.” (p.14)

그렇게 서로에게서 멀어졌던 두 남녀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랑 소설의 순리일 터이다. 하지만 그러한 헤어짐이 있었기에 이야기가 된다. 가만히 붙여 놓았다면 갖은 분란 끝에 스러져갔을 사랑이 기나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곰삭혀졌다가 어느 순간 대명 천지로 끌려 나온다. 잠시 눈앞의 모든 것들을 잊게 만들 화이트 아웃이 일어나고 그들은 이제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 인생은 야반도주를 했던 그날부터 조금씩 어긋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사소한 어긋남이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싸늘한 밤바람 속에서 나는 현실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틈새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p.133)

어린 시절 테트라가 우체통에 넣었던 편지가 노랫말이 되어 테트라에게 닿고, 다마히코가 유키히코가 되어 나타나고, 그러한 유키히코를 따라 하와이를 향하고, 그곳 사우스포인트에서 서로를 다시 확인한다는 길고 긴 화이트 아웃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이제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틈새는 사라지게 된다. 블랙 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사랑만이 남게 되니 요시모토 바나나 답다.

“사람이 무언가를 염원하는 힘의 크기와 그 느낌이 이어지는 모습을 무늬로 한다면, 퀼트로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복잡하고 거대할 것이다. 마치 하늘을 질러가는 용의 복잡한 비늘 모양처럼.” (pp.215~216)

창밖으로부터 서늘한 바람 불어온다. 한낮의 호들갑스러운 더위를 잊게 만들어주는 개운한 새벽 바람 불어올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폭염에 한 발 앞서 장마가 온다고 한다. 이렇게 차근차근 계절은 순리를 지켜가며 제 도리를 다하는 중이다. 여하튼 아, 이제 요시모토 바나나는 그만 읽어야지, 하면서도 또 이렇게 읽고 말았다. 허접한 사랑 이야기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러니까 정은 무섭다.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역 /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サウスポイント) / 226쪽 / 2013 (2008)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에쿠니 가오리 《잡동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