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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아무도 들추지 않는 페이지를 위하여 누군가는 전 생애를 할애하기도...

by 우주에부는바람

어린 시절 집에 있는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가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으면 국어 사전을 꺼내들고는 했다. 물론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런 것처럼 성적인 단어들을 가장 먼저 찾았고, 그 알쏭달쏭한 해석에 갸우뚱거렸던 것도 같다. 그 후 옥편과 영어 사전으로 지평을 넓혀 가면서 과거의 국어 사전은 잠시 뒤로 미뤘다. 대학 입학 이후 헌책방에서 두꺼운 사전을 하나 샀고, 큰 뜻을 손가락 끝에 모아서 그 첫 장을 넘겼던 기억도 난다. 물론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지만...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 (p.36)


미우라 시온의 이번 소설은 바로 그러한 사전 편집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전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 마쓰모토 선생과 출판사의 사전 편집자인 아라키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들 두 사람이 《대도해》라는 사전을 만들기 위해 출판사의 다른 부서에서 픽업한 마지메를 통하여 더욱 견고해진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에 빼곡하게 딤긴다. 그렇게 이들이 사전을 만들 생각을 하고 적당한 사람을 합류시키고 누군가는 다른 부서로 나가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하면서 사전을 만든 시간이 무려 십오 년이다.


그 사이 시쳇말로 오타쿠와도 같은 마지메는 사전 만드는 일에 전력투구를 하는 모습에 반한 아름다운 요리사 가구야를 아내로 맞이한다거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마지메와 니시오카가 서로 의기투합을 하게 되고, 패션지를 만들다가 사전 편집부로 이동해온 기시베가 의구심 가득하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사전의 마무리 작업에 몰두하는 등 소소한 사건들이 끼어들기는 하지만 역시 전체적으로는 사전 편집이라는 천직을 갖게 된 마지메의 인생이 곧 소설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 삼각관계에 빠져 보지 않고는 그 쓴맛도 괴로움도 충분히 자시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은 말을 바르게 뜻풀이할 수 없겠죠. 사전 만들기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과 사고思考의 지치지 않는 반복입니다.” (p.72)


수많은 단어들을 끊임없이 챙기고, 또 그것을 알맞게 분류하거나 취사 선택하고, 그리고 그 단어들의 의미를 적절히 설명하여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고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과 그 작업을 멈추지 않고 해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다. 지금이야 언제든 인터넷에 단어를 입력하는 것만으로 금세 원하는 답이 튀어나오는 세상이지만, 어린 시절 이리저리 페이지를 뒤적이며 가까스로 단어를 찾아 내고, 또 그렇게 찾은 단어의 앞뒤에 있는 다른 단어로 시선을 옮겨 가며 시야를 넓혀가던 것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읽어내는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 누군가는 그 책에서 딱 한 단어만을 찾아볼 수도 있고, 아무리 많이 쳐준다고 해도 (대사전류라면) 1% 남짓의 페이지 정도만 읽을 것이 뻔한 사전을 위하여, 또 다른 누군가는 우리 대부분이 거들떠도 보지 않을 99%의 단어들을 위하여 이렇게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짓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말이란, 말을 다루는 사전이란, 개인과 권력, 내적 자유와 공적 지배의 틈새라는 항상 위험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죠... 말은, 말을 낳는 마음은 권위나 권력과는 전혀 무연한 자유로운 것입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자유로운 항해를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엮은 배...”(p.288)


미우라 시온 특유의 가벼운 문체로 써내려가고 있지만 소설에 들어 있는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하였고, 그 말을 집대성한 사전을 주제로 하고 있으니 좀더 심오하게 풀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미우라 시온이 할 일은 아닐 터... 어쩌면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오히려 들여다보면 이상해 보이기만 하였던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바로 지금 그렇게 소소한 듯 보이지만 위대한 작업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미우라 시온의 소설은 그 정도를 해내는 것으로도 나쁘지 않다.



미우라 시온 / 권남희 / 배를 엮다 (舟を編む) / 335쪽 / 20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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