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김 박사는 누구인가?》

유머 본능을 숨기면서도 여유만만하게 이야기의 향연 속으로...

by 우주에부는바람

「행정동」.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재입력하는 전산 업무에 임시직으로 고용되어 있는 주인공의 어느 겨울날, 그 하루가 참으로 신산스럽다. ‘명백한 오타’임을 주인공이 깨닫는 장면에서는 지금 우리 또한 자신의 현재를 기록하는 일에서 오타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임시직 직원인 남녀가 벌이는 숨바꼭질 같은, 서글프기 그지없는 충돌이 보기에 안쓰럽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이 차는 그래서 지금까지 굴러가게 된 거라우. 후진이 안 되니까... 아무래도 엔진에 무리가 덜 가지 않았겠수? 원래 잡다한 기능들 때문에 제 기능들이 망가지는 법이라우.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지.” (p.81) 차랑 연애를 하는 것이라고 믿어지던 삼촌의 눈에 보이는 행각들, 그러나 그러한 삼촌이 바로 그 프라이드 차량을 나의 집 앞에 놓고 간 이후, 나는 드디어 보이지 않았던 삼촌을 볼 수 있게 된다. 후진이 안 되는 차량이라는 소재가 이렇게 발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

다른 소설에 비해서 덜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표제작이라고 이거지... 학교 선생님들인 부모와 어렵게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딸이라는 설정... 갑자기 누군가에게서 욕을 하라는 부추김을 받게 되는 딸과 그 딸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 형식적으로 딸이 묻고 김 박사가 대답하는 형국인데, ‘이제 다들 아셨죠, 김 박사가 누구인지?’ 라고 묻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도 나는 계속 갸우뚱거리기만 하였다. 김 박사가 있다면 김 박사가 누구인지 묻고 싶을 정도로...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안구 이식 신청을 기다리고 있다가 병원 관계자의 도움으로 드디어 기회를 얻게 된 전도사... 그렇지만 뇌사 상태에 빠진 기증자의 가족들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안구를 이식 받는 행위, 그리고 관계자의 도움으로 새치기를 한 것은 아닌지 하는 번민 등으로 복잡한 심경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전도사가 있는 방으로 숨어들었던 한 소녀와 그 소녀를 향하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자신의 인생을 향한 믿음은 언제고 흔들릴 수 있고, 때때로 그러한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일종의 추근거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탄원의 문장」.

“우리가 알고 있는 입증 불가능한 것들은, 어쩌면 입증 가능한 사실들로부터 나오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것은 ‘발견’의 영역이지, ‘발명’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사실들과 사실들 틈 사이에서 불가능한 것들은 시작되고 피어난다는 것, 그래서 숙명적으로 사실들의 세계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최의 탄원서는 시작되었다.” (p.205) 실린 소설들 중 가장 애호하게 되었다. 우리들 삶에 부여되기도 하는 어떤 불가해함을 부정함으로서 역으로 그 불가해함을 아주 총명하게 밝히고 있다고나 할까. 이야기 전체의 얼개도 얼개지만 외동딸의 죽음 이후 시골의 두 내외가 벌이는 작은 실랑이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이정(而丁) -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2」.

박헌영의 호인 ‘이정’을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엄마, 그 이름 때문에 남편과 이혼을 했다고 생각하는 엄마, 그럼에도 계속 그 이름을 가지고 있던 엄마는 이제 아들이 대학에서 ROTC를 지원하겠다고 하자 개명을 결심하며, 아들에게 이를 부탁한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의 개명 이유를 생각하며, 자신의 외할아버지에게로 관심을 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알고 있는 장기수와 통화를 하게 된다. ‘나무처럼 걸어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무가 사람처럼도 아니고 사람이 나무처럼, 붙박힌 듯 휘청휘청 걷는 우리들 삶의 모양이 늘 저런 것일까...


「화라지송침」.

아내의 제종 사촌(촌수 따지기도 쉽지 않다) 김기종의 이야기이다. 몇 년 전 일종의 인신 구속 구출 프로그램 같았던 <SOS 긴급출동>의 한 에피소드로부터 그 단초가 제공되었을 법하 이야기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 오갈 데 없는 부녀를 거둬준 친척,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그 집안이 몰락한 이후 이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티비에 노출되는 지경에 처한 김기종씨. 그러한 김기종과 자신의 아내의 관계에 대한 남편인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꽤 유머러스한 작가가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소설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하기 얼마 전 제대한 나, 별달리 할 일이 없어 빈둥대다가는 아버지에게 덜컥 붙잡힐 것 같은 나는 나와는 성향이 전혀 다른 형이 살고 있는 서울의 자취방으로 피신을 하지만... 반바지라고 생각한 형의 사각 트렁크 팬티 또는 트렁크 형 반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던 내가, 그만 열쇠를 놓고 나오는 바람에 겪게 되는 좌충우돌 상황극이다.


그저 심드렁하게 지나칠 수도 있을 법한 이런저런 이야기꺼리들을 낚아채는 작가의 솜씨가 일품이다. 그리고 제대로만 걸리면 뼈도 못 추리고 작가가 휘두르는 칼날에 근사하게 요리되고 만다. 꿈틀거리는 유머 본능을 숨기며 지긋하게 작성한 소설들이 대부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곳에서는 이를 숨기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냉소적이지 않은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이기호 / 김 박사는 누구인가? / 문학과지성사 / 403쪽 / 20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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