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 《정결한 집》

정결한 문장으로 엮어낸 이후에야 정결해지는 숙명의 삶들...

by 우주에부는바람

「정결한 집」.

소년의 ‘정결한 집’에서는 지금 비겁한 모성이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름 공부도 잘 하던 학생이 자신의 부모를 (혹은 부모 중 누군가를) 살해하고 그 시체와 함께 몇 개월이나 생활했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겉에서 보기에는 차갑되 정결하게 보이는 구석이 있는 단촐한 이 모자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소년의 곁에 다가서는 소녀 명희의 존재도 희미하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다 간결함에서 정결함으로 나아간 듯 보이는, 작가의 짧은 문장이 주는 속도감이 매력적이다.


「흔들의자」.

“노동자들은 죽음을 낯설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일상이었다. 그들은 해고자를 ‘죽은 자’라고 불렀다. 비해고자는 ‘산 자’였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의 경계는 불분명했다. 모두 비슷한 사람들인데, 어떤 이는 산 자가 되었고 어떤 이는 죽은 자가 되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들이 뒤섞여 함께 밥을 먹고, 토론하며, 농성했다. 그들은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니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들 사이를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들이었다...” (p.52) 해고 노동자를 남편으로 둔 여인의 심경이 흔들리는 집이라는 설정 아래에서 비감하다. 흔들리는 집과 흔들리는 상공과 흔들리는 의자라는 소설 속 구조물들의 배치 또한 훌륭하다. 그리고 그 흔들림들 사이로 죽음이 유령처럼 떠돈다.


「모과 냄새」.

“그는 빙긋 웃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지만, 덧없는 세월 속에서 삶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세월의 갈피에 간혹 흰 빛처럼 끼어 있는 기억들이 사라진 삶을 잠깐이나마 되살려놓곤 했다. 그런 눈부신 기억이 없었다면 지나온 삶은 시간의 얼룩에 불과했을 것이다...” (p.91) 딸의 혼사를 치르는 초로의 남자의 심경이 아스라하지만 고스란히 전달된다. 혹여 사기 결혼이라도 당하는 것이 아닌가, 초반에 조바심을 냈는데 그러한 설정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딸을 시집 보내며 자신의 어머니 혹은 그 어머니를 시집 보내던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는 아비이자 아들인 자의 속내가 환하다.


「녹슨 자전거」.

큰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국 전쟁 때 돌아가셨다)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방황하였던 아버지는 결국 병역 기피자가 되어 바깥을 떠돌았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그 집에 남아 있던 것은 아버지의 녹슨 자전거였다. 그리고 나는 군에서 병역 기피자들을 수감하던 교도소에서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나의 아들 성호가 종교도 아닌 그저 자신의 신념 하나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고 교도소에 갇혀 있다. 삼대로 이어지는 이 질긴, 군대라는 조직과의 연이 안타깝기만 하다.


「오래된 몽상」.

“... 어머니가 왜 나를 낳았는지, 낳은 후에는 왜 죽이지 않았는지 나는 모르오. 누군가가 그랬소. 기억은 망각 위에 덧칠하는 어떤 것이라고. 나는 내가 어머니의 배 속에서 잉태되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소.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증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오. 증언자가 될 수 없는 운명에 나는 고통을 느꼈소...” (p.145) 어느 날 들려온 워이커씽 씨의 죽음에 대한 소식... 그리고 일본의 난징 대학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천황을 신으로 보았고 자신들을 신군으로 생각했기에 별다른 죄책감 없이 자행하였던 일본군의 만행이 그 중심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만행의 산물에는 죽음이 아닌 탄생 또한 존재하였으니 그 희생양이 바로 워이커씽 씨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워이커씽 씨는 과거 일본군을 폭력으로 내몰았던 신이라는 존재의 위용을, 홍위병을 거쳐 베이징 올림픽의 거대한 퍼포먼스에서도 느끼고 있다.


「세이렌의 노래」.

“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데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모욕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이다. 사랑이 꿈과 기적 사이의 어떤 것이라면, 모욕을 절망과 죽음 사이의 어떤 것이다.” (p.164) 트로이 목마의 이야기와 용산 철거민의 죽음이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의 배경으로 무언가를 홀리기 위하여 울려 퍼지는 세이렌의 노래가 들린다. 하지만 그 세이렌의 노래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자는 혼몽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혼모으로부터 깨어날 수도 있는 것일까...


「음유시인의 갈대 펜」.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 보다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의 글쓰기의 연원 혹은 그 영원한 지향점을 찾아나서는 작가의 여정... “문자는 노래와 다릅니다. 우선 문자는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눈으로 읽을 수 있을 뿐입니다. 표현하려는 내용을 올가미에 묶어서 보여주는 것이 문자입니다. 묶지 않으면 흩어져버립니다. 묶는다는 것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입닏. 문자는 인간의 몸을 진동시키지 못합니다. 자연의 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지 못하는 감각은 신의 숨결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p.210) 문자를 다루면서도 그 문자 이상을 향하고 있는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새겨진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운명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운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운명을 볼 수 없습니다. 신만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가는 신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죽음의 들판에서 느꼈던 신의 시선 말입니다. 노래는 귀로 듣습니다. 귓속으로 흘러드는 소리에 신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문자는 눈으로 봅니다. 눈에 보이는 문자에는 신의 숨결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신의 숨결은 문자가 조각해내는 운명의 형태 속에 고여 있습니다...” (p.222)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는 것인가, 기시감이 드는 것은 왜인지... 마치 <혹성탈출>의 한껏 철학적인 정찬 버전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의 언어를 하고 심지어 다분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문이라고 여겨지는 인문학적 소견까지도 가지고 있는 빨간 피터, 그리고 그 빨간 피터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섰던 또 다른 침팬지였던 외젠을 그리고 인간을 이야기한다. “... 저는 아직도 제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저에 대해 제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침팬지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사이에서 가느다란 줄을 타고 위태롭게 왕복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간혹 침팬지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뒤섞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영혼의 분열을 겪지 않는 유일한 시간이지요. 그림자가 분열되지 않는 그 놀라운 시간에 외젠이 나타납니다. 침팬지 외젠 말입니다...” (p.257)



정찬 / 정결한 집 / 문학과지성사 / 275쪽 / 20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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