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욕정이 만들어내는 불모의 공간에 대하여...
*2013년 6월 9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삶은 거창한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그저 짐승이나 진배없는 두 인간의 쾌락을 담보로 한 육체적 행위로부터 시작될 뿐이다, 라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합법적인 관계가 아닌 결혼한 남자와 처녀 사이의 섹스에서도, 아직 앴띤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어린 남자와 어린 여자 사이의 섹스에서도 삶은 그 시작을 예비하게 된다. 이러한 시작은 항상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어서, 때로는 그 수습의 방법을 찾지 못하여 헤매기도 하고 평생 가슴에 남을 방법으로 수습을 하게도 된다.
“몸을 다 싸고도 한 뼘이나 남았던 배냇저고리, 꼬마 기차가 그려진 하늘색 포대기, 꽃무늬가 프린트된 우유병, 한낮의 빨랫줄에 눈이 시리게 펄럭이던 옥양목 기저귀,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볼이 터질 듯 통통했던……, 기저귀를 갈아주면 얼굴이 햇살 받은 것처럼 환해지던 아이. 이십 년이 넘도록 그런 것들이 시린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이 아팠다...” (p.83)
소설은 이처럼 수습되지 않는 과거 혹은 잘못 수습된 현재를 가진 채 에메랄드 모텔을 운영하고 있는 연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남자를 좋아하고, 그 남자와 맺은 관계로 아이가 잉태되고, 잉태한 아이를 구실로 남자와 함께 집을 나온 연희는 그러나 그렇게 나은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수는 없었다. 아이를 버리고, 삶을 핑계로 아이를 되찾기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아예 아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제 과거를 묻는 공간으로 모텔을 선택하였다. 자신이 수습하지 못하였던 그 시작, 그 어줍잖고도 어두운 관계가 시작되는 공간인 모텔에서 그녀는 자신의 지난 시간을, 남녀가 흘리고 다니는 섹스 후의 흔적을 지워가며, 그렇게 차곡차곡 묻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그곳은 언제고 또 다른 연희가 출현할 개연성으로 가득한 공간이니, 그곳에서의 연희가 행복하기는 어렵다.
“만명슈퍼 안주인의 죽음은 연희에게 끔찍한 기억이었다. 버리고 온 여자가 찾아왔고, 그리고 눈앞에서 죽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나온 것이, 남의 남자와 살을 섞고 살면서 얻은 아이까지 버린 것이, 그러고도 또 그 남자와 살을 섞고 산 것이, 그래서 한 여자를 눈앞에서 죽이고야 만 것이 너무나 더러운 죄여서 연희는 오줌 누러 갈 때마다 샅을 락스물로 씻었다...” (p.98)
게다가 자신의 현재의 남편인 상만의 아내가 찾아오고 자살을 한 공간 또한 에메랄드 모텔 이전에 연희와 상만이 운영하던 여인숙이다. 그리고 이제 연희와 상만은 도주를 감행하던 과거로부터 벗어나 함께 어엿한 모텔을 운영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서로를 할퀴고 상처내며 증오의 마음을 키우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 서걱거리는 불모지에도 훈풍이 불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상처를 입는 공간인 그곳을 찾았던 두 명의 노인이 아마도 유일한 희망의 모습이라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푸르고 힘찬 욕정이 오히려 모든 것을 앗아가도록 만드는 그곳을 그나마 따듯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자식들의 반대로 함께 살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자 찾아든 노년의 커플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부여받은 마음으로 연희는 자신에게 남겨진 다현이라는 갓난 아이를 품을 생각을 한다. 시작과 끝은 그렇게 맞물리니 거칠고 어둡고 낙담이 가득한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는 것이다.
“... 숟가락을 든 오른쪽 팔부터 어깨까지 전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찌릿하다. 처음엔 배가 아픈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다. 몸속에서 뭔가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깨까지 올라간 그것은 가슴으로 다시 내려오고 젖꼭지까지 미끄러진다. 침을 맞은 것처럼……, 이것은 젖이 도는 것이다...” (pp.280~281)
근래의 많은 문학상이 밝고 명랑한 소설에 한 표를 던지는 기색이 역력한데 이번 소설은 그렇지 않다.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소설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어두움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미간을 자주 찌푸렸다. 문장도 나쁘지 않고 흐름도 나름 탄탄하였지만 기껍게 읽어내지 못하였다. 무언가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탓이다.
박향 / 에메랄드 궁 / 291쪽 / 나무옆의자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