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하지 않고 뚜렷하게 기억하면서도 모든 죽음에 안식을...
*2013년 6월 16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지난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던가, 제주엘 다녀왔다. 뷰 파인더에 붙잡히는 풍경들은 그저 저절로인 듯 맑고 쾌청하였으며 아름다웠다. 1948년 그곳에서 만사천여 명의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제주의 하늘은 삽시간에 모습을 바꾸고는 했다. 먹구름이 몰려왔고 몇 개의 오름을 지나갔을 무렵에는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믿기지 않지만 그곳에서 벌어졌던 만행은 엄연하고, 영화는 바로 그 엄연한 사실을 지금 이곳으로 끌어온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끌어온 사실을 곱씹어 분노케 하거나 눈물짓도록 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매너리즘에 빠진 화해의 제스처를 부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바로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때로는 웃음과 함께 때로는 당혹스러움과 함께 때로는 숨죽이는 절규와 함께 때로는 삼켜버린 눈물과 함께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 한바탕 우리들 모두의 삶에서 드러나는 애잔하고 극진한 삶과 다를 바 없는, 하지만 그 순간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 있어 우리들 모두의 소소하고 평온한 삶과 같을 수 없었던 시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제목이 ‘지슬’인 것은 바로 이들의 삶이 우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임을 직시하도록 해준다. 코앞에 당도해 있는 죽음보다는 굶고 있는 돼지가 더욱 걱정이 되는 것처럼 이들은 죽음 보다는 지슬, 그러니까 자신들의 삶을 위하여 필요한 감자 한 알에 더욱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도망치는 자식에게 들려 보내지 못했던 감자와 함께 불탄 노모, 그리고 그곳에서 감자를 들고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자식이 존재할 때 ‘지슬’은 이들의 삶을 우리들의 삶과 변별되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도망갈 곳 없는 섬이라는 공간에서, 무구한 섬 주민들과 이식된 학살 군인들, 영문 모르는 두려움과 이유 없는 증오가 격돌하는 상황을 감독은 흑백의 영상에 담아 내고 있다. 이것이 또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다. 특히나 증오심 가득한 군인들에게 능욕당하고 죽임을 당한 여인을 뒤로 한 채 달려가는 사내의 아래로 검은 오름이 여인의 벗은 몸으로 오버랩 되는 장면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 모두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제의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신위, 신묘, 음복, 소지라는 챕터로 나뉘어진 영화는 마지막 순간 그들 모두의 죽음 옆에서 지방을 태워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 역사적 현장에서 맞이했던 모든 죽음에 골고루 안식을 헌정하고자 하는 (제주도 출신의) 감독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하니 이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아픔을 간직한 제주 섬은 여름을 앞에 둔 지금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그 섬의 곳곳에서 여전한 아픔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은 망각을 재촉하고 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할 때 망각할 수도 없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제주 4.3 항쟁과 그 역사의 현장에 있던 모두를 포함하여 우리의 아픈 현대사에 대한 부정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정말로 부정하고 싶고 잊고 싶다면, 그에 앞서 먼저 뚜렷하고 또렷하게 기억하라고.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 / 오멸 감독 / 이경준, 홍상표, 문석범, 박순동, 성민철, 조은 외 출연 / 108분 / 2013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