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찌질하여도 살아내야 하는 우리네 삶의 기구한 역사...
*2013년 5월 1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소설 <고령화 가족>을 읽고 남긴 리뷰를 살펴보니 위와 같은 문구가 발췌되어 있다. 아마도 소설을 정리하는 문장이라고 여겼으리라. 영화에서도 말미에 박해일의 입을 통해 위와 같은 문장으로 만들어진 나레이션을 들었던 것 같다. 아마 감독도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담긴 문장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니까 소설이든 영화든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 너의 삶이 찌질하다고 여겨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살아라, 라는 것...
영화가 전달하려는 바가 (소설이 전달하려고 하는 바도 마찬가지) 이러니 일단 등장하는 인물의 찌질함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좋다. 그래서 이 집의 맏아들 한모는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쉰이 넘은 나이에 엄마에게 얹혀 살며 중학생이 조카의 피자를 빼앗아먹는가 하면 잠결에 소파에서 제 성기를 주물럭거리고 급기야 중학생 조카의 빤스를 뒤집어쓰고 자위를 하다가 걸리는 엽기적인 수준의 찌질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한모의 동생 인모와 미연도 빠지지 않는다. 집안에서 가장 똑똑해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지만 (그러고보니 <괴물>의 박해일 또한 형제들 중 가장 나은 인물이지만 왠지 헛똑똑이인 듯 싶은 캐릭터였는데...) 첫 번째 영화를 말아 먹고 아내는 바람을 피워 별거 중이며 집세를 못내서 결국 어머니에게로 돌아온 상황이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이지만 형인 한모와 아직도 몸을 부딪치며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으니 현실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캐릭터이다.
이처럼 인모가 들어온 집에 마지막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이 삼남매의 막내인 미연, 그리고 미연의 중학생 딸 민경이다. 두 번의 결혼이 모두 실패한 미연과 엄마를 빼닮은 듯한 민경은 욕을 입에 달고 산다. 비구니처럼 살겠다던 미연은 집 앞에서 카섹스를 하려다 오빠에게 걸리는가하면, 민경은 담배를 피다가 삼촌에게 걸려 용돈을 걸고 협상을 할 정도로 되바라진 아이이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그 중심에 엄마 윤여정이 있다.
어쨌든 집으로 들어온 자식들을 품에 안는 엄마, 삼계탕과 닭죽을 끓여 놓는 엄마, 밤마다 삼겹살을 굽는 엄마, 자신이 배 아파서 낳지도 않은 자식을 끝까지 챙기는 엄마, 엄마이지만 여자이기도 하여서 남편이 아닌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엄마, 이처럼 서로 다른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세 남매에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사랑을 베풀었던 엄마, 그렇게 아무리 찌질하여도 그저 사랑으로 자식의 평생까지를 품에 안아버리는 엄마가 있다.
오랜만에 다시 뭉친 이들 엄마와 자식의 이야기는 집 나간 조카 민경을 찾으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조카의 빤스를 뒤집어 쓰고 있던 큰 삼촌은 또다시 교도소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바지사장을 하기로 하고 조카를 찾아내며, 작은 삼촌은 그렇게 찍기 싫어하던 에로 영화의 연출직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카를 찾아내기 위한 비용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이들 식구 (그러니까 밥 식자에 입 구자), 함께 밥을 먹던 이들이 서로를 위하여 행동하면서, 식구의 역사 그리고 개개인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원작인 소설이 워낙 재미있고 그 캐릭터가 오묘하니, 그것을 기반으로 한 영화 또한 나쁘지 않다. 윤제문과 박해일과 공효진, 그리고 윤여정의 연기는 한모와 인모와 미연, 그리고 엄마 캐릭터를 스크린으로 옮겨 놓기에 충분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빵꾸똥꾸 진지희나 능청스러운 예지원과 같은 감초 캐릭터도 적절하게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딱히 연출의 묘미가 발휘될만한 여지가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이들 연기자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감독 송해성의 몫이었을 터이다.
고령화 가족 / 송해성 감독 / 윤제문, 박해일, 공효진, 윤여정, 진지희 출연 / 112분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