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무중의 세계 속으로, 하지만 일관되게 행보하는...
*2012년 7월 1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예전처럼 영화를 열심히 보지는 않지만, 때로는 영화가 그리워서 동시에 영화를 열심히 보던 시절이 그리워서 영화관을 찾고는 한다.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을 때 나는 남포동의 허름한 여인숙에 여정을 풀어 놓은 채, 하루에 다섯 편까지도 영화를 보았다. 허리를 부러뜨릴 것처럼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영어자막으로 본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더불어 영화를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직장생활을 하던 애인에게 붉은 색 공중전화를 통하여 돈을 보내 달라고 요구한 기억도 있다. 졸업 후 사회 초년병의 어리둥절함으로 정신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여친에게, 햇살 좋은 부산의 공중전화로 졸업 불가 8년차 휴학생인 남친이 그런 요구를 하였으니 들려오는 지청구의 데시벨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하지만 애인은 내게 돈을 보냈고, 난 하루를 더 묵을 수 있었으며 덕분에 <증오>를 보았다. 그리고 그 무섭지만 착했던 애인은 지금 나의 착하지만 무서운 아내와 동일 인물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그때의 영화 사랑하던 마음을 사랑하는 나는 그 부산의 기억을 되살려, 작년 여름 (서울의 중심가가 물바다가 되던 시기에) 하루 휴가를 내고 <그을린 사랑>과 <인어베러월드>를 씨네큐브에서 보았고, 올해는 다시 작년의 기억을 되살려 <멜랑꼴리아>, <다른나라에서>,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작년보다 한 편을 늘려서) 건국대학교 내부에 있는 KU시네마테크에서 하루동안 섭렵했다.
잠깐 KU시네마테크를 스케치하자면, 대학교 내부에 있는 독립영화를 (아트영화든 인디영화든 여하튼 주류 대중영화로부터 조금 비껴있는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 극장인데, 오픈한지 얼마 안 되었고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덕분인지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첫 번째 <멜랑꼴리아>를 볼 때는 관객이 네 명 뿐이었고, 오후에 <두결한장>을 볼 때도 전체 관객이 열 명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번째 영화를 기다리며 차를 한 잔 마시고, 어정쩡하게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우다가, 강의를 하러 가는 길인지 예의 그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홍상수 감독을 흘낏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세 편의 영화 중 두 번째 영화로 <다른나라에서>를 보게 되었다. 모항이란 해변 마을의 펜션, 빚에 쫓겨 내려온 어머니와 딸의 대화로 시작되는 영화는, 결국 그곳에서 묵으며 하릴없었던 딸이 이거라도 끄적이자 하는 태도로 써내려간 세 편의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렇게 세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여 등장하는 것은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영화 바깥의 창작자이며 영화 속에서는 펜션 주인의 딸로 나오는 정유미, 그리고 모항 해변의 안전요원인 유준상, 그리고 ‘다른나라에서’ 방황하는 (<피아니스트>의 바로 그) 이자벨 위페르가 분한 안느이다.
이렇게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안느는 프랑스의 영화 감독으로 한국을 방문중이다. 그녀는 종이라 부르는 영화감독 종수와 프랑스에서 키스를 한 기억이 어렴풋이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이성간의 에로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종수는 만삭의 아내와 함께 한 여행에서 자꾸 안느에게 그 과거의 키스를 확인하려 한다. 그리고 바닷가를 산책 중에 안느는 안전요원 유준상을 만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안느는 해외주재 상사인 남편을 두고 있지만 자신은 수라고 부르는 영화감독 종수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모항의 펜션에서 만나기로 하였고, 안느는 조금 미리 내려왔다. 안느는 바닷가가 아닌 등대에서 수와의 밀회를 상상하다 낚시꾼을 만나고, 뒤늦게 내려온 종수와 재회한다. 그 사이 안전요원인 유준상과 안면을 텄고, 이를 두고 종수는 크게 질투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한국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안느와 안느의 한국 친구 윤여정이 함께 하는 여행이다. 자신의 상실감을 추스르기 위하여 안느는 윤여정의 도움을 받고, 도올 김용옥으로부터 조언을 받기도 하지만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윤여정으로부터 김용옥이 받은 만년필을 얻었을 뿐이다. 오히려 안느는 소주를 마시며 해변을 걷다가 안전요원인 유준상을 만나고, 그의 텐트에서 잠이 들기까지 한다.
영화는 점차 일반 관객들과 멀어지며 오리무중의 세계로 (그럼에도 후하기만 한 평론가들 별점의 세계) 빠져드는 홍상수의 영화답다. 영화의 안과 영화의 밖, 시나리오를 쓰는 자와 시나리오로 표현되는 자, 내국인과 이방인, 우리나라와 다른나라라는 어떤 이분법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수작으로 충만하다. 여기에 누워 침뱉기 식으로 찌질하기 이를데 없는 작태로 그려지는 영화감독(내지는 지식인)과 그들에게 휘둘리는 듯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주변인들의 구성은 산만한 가운데, 여타의 다른 작품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어느 여름이던가 잠실 롯데 시네마에서 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부터 시작된 홍상수 탐색의 흥겨움은 <오 수정>을 거치며 최고조에 다다랐다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극장전> 이후로는 조금 시들해져 아직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케이블 티비를 통하여 살펴본 바, 일관성 있게 찌질한 지식인에게 비아냥을 날리는 중인 것 같은데, 그 이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나... <하하하> 이후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에 대한 평론가들의 아낌없는 추천의 발언을 확인하기는 하였으나, 나의 믿음은 아직 흩어진 모래알만 같다.
다른 나라에서 / 홍상수 감독 / 이자벨 위페르, 유준상, 정유미, 윤여정, 문성근, 권해효, 문소리 출연 / 89분 / 2012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