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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김수영을 위하여》

그처럼, 우리들 모두가 단독자로 거듭나기 위하여...

by 우주에부는바람

어린 독서광에서 문청으로 거듭나는 시기가 되면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읽어야 하는 시인이 두 사람 있다. 김수영과 신동엽이 그들이다. 그리고 신동엽이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 시인이라면 김수영은 모더니즘 게열의 대표 시인으로 대략 (난감하게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김수영을 그렇게 판에 박힌 잣대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가 추구한 모더니티는 허세가 난무하던 당시의 모더니즘 계열 시 혹은 시인들을 향하여 첨예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의 모너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火焰)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 - 육체로서 - 추구할 것이지, 시가 - 기술면으로 - 추구할 것이 아니다.”

- 김수영, <시월평 : 모더니티의 문제> (1964.4)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우리의 현대시가 우리의 현실이 뒤떨어진 것만큼 뒤떨어지는 것은 시인의 책임이 아니지만, 뒤떨어진 현실에서 뒤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시를 위조해 내놓는 것은 시인의 책임이다.”

- 김수영, <시월평 : 모더니티의 문제> (1964.4)


“... 시에 포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크게 말하자면 시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모두가 커다란 의미의 포즈다... 현대시에서 있어서 포즈라는 것은 좋게 말하면 스타일로 통할 수 있는 것이다... 포즈가 성공을 거두고 실패를 하는 분기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 진지성이다. 포즈 이전에 그것이 있어야 한다. 포즈의 밑바닥에 그것이 깔려 있어야 한다.”

- 김수영, <시월평 : 포즈의 폐해> (1966.6)


사실 누군가를 읽어내는 글을 다시 읽는 일은 그다지 재미있는 작업은 아니다. 게다가 (이번 강신주의 글처럼) 이런 평전 혹은 평론 형태의 글이 잘 씌어져 있으면 불가피하게도, 이를 읽는 독자는 자꾸만 그 평전의 대상 인물 혹은 평론의 대상 작품에게로 시선이 쏠리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이유로 고이 모셔 놓고 있던 민음사간 김수영 전집을 몇 번이나 뺐다가 꽂았는지 모른다. (결국 다시 뺐고 곧 읽을 참이다.)


“... 허용된 자유는 언제든 허락한 측에서 철회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자유, 아니 정확히 말해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체제가 우리를 핍박하려고 할 때, 우리는 나약하게 외칠 것이다... 저는 한계를 지켰는데, 왜 그러세요? ... 너무나 어리석고 나약한 한탄을 토해 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허용된 자유를 거부하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 (p.21)


책은 김수영의 시 그리고 산문을 토대로 하여, 저자인 강신주가 그것들을 (아주 친절하게) 분석해가며, 김수영이 토해냈던 인문학적 정신을 따라가는 길잡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 김수영이 보여주었던 어떤 체제나 관습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인문학적) 인간, 그가 자신의 시를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였던 단독적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인문학적) 인간, 더불어 자신의 시선을 산의 정상 그 위로까지 끌어올려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인문학적) 인간에 도달하고자 하였던 (설령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모습을 저자는 아주 또박또박 따라간다.


“... 사태와 자신이 고정된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거리 두기에 실패할 때, 시는 쓰일 수 없다. 시를 탄생시키는 마음은 고정된 의미망으로부터 벗어난 구름처럼 자유로운 마음이다. 물론 산정의 마음만 있어도 타자를 응시하고 자기를 이해하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름의 마음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마음일 뿐이다... 산정의 마음은 정해진 고도감만으로 모든 사태를 관조하는 종교적인 태도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구름의 마음은, 현재 자신이 떠 있는 위치마저도 매번 거부하면서 낯섦의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의 마음이다.“ (p.54)


그리고 이러한 김수영의 정신은 어쩌면 저자인 강신주에게로 접신이라도 하듯 옮겨진다. (신문 지면 등을 통해 발표되는 강신주의 여러 칼럼은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훌륭한 바로미터의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다) 김수영이 시를 쓰는 이로 그 역할을 수행해냈다면 (물론 김수영은 그의 시 만큼이나 산문에서도 독보적이지만) 강신주는 산문을 쓰는 이로 그 역할을 수행해낸다.


“... 아무리 다양한 담론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그가 바로 지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나 사회의 문제에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는 담론을 부여할 수 있을 때에만, 그는 지성인으로 불릴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담론을 배운 사람이 무지한 사람보다 더 못한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담론을 자신과 사회가 가진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하는 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결함을 은폐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p.296)


김수영이 사고로 죽은지 사십 오 년이 흘렀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의 시기를 살아냈던 그는 떠났지만 그의 발언은 여전히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과거보다 훨씬 교묘하고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치며) 길들여진 정신에 쇳물을 들이붓는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유연해진 인문학적 정신을 어떻게 두들기고 어떤 모양을 만들어갈 것인지는 독자들의 몫이 될 터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단독자들이니 말이다.


“인간의 자유를 불온하다고 보지 않는 세상,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려는 의지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는 세상, 바로 이것이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부터 비운의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뜰 때까지 서럽게 가슴에 품은 이상이다. 그의 이상이 실현된다면, 권력, 자본, 종교, 관습이 애써 지키려는 공통된 중심은 지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세상은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다양한 소리들이 울려 퍼지는 장관을 연출할 것이다...” (p.379)



강신주 / 김서연 편집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김수영을 위하여 / 천년의 상상 / 413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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